나주 누정(2) 금사정(錦社亭)①
나주 누정(2) 금사정(錦社亭)①
  •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승인 2017.09.21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강11인현계의 후손이 숙종 때 수계(修禊)를 복원하여 활동하였던 장소
▲ 금사정 전경

금사정(錦社亭)은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130번지 외구마을에 있다. 금사정은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백나무가 천연기념물(식물-노거수) 제515호(2009. 12.30)로 지정되어 있다.

금사정은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 때 나주출신 태학관 유생 11인이 조광조를 구명하는 상소를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시 정치상황에 실망해 낙향하여, 금강11인현계(錦江十一人賢禊)를 조직하여 좋은 때의 날을 받아 금강을 선유(船遊)하며 시주(詩酒)와 강론(講論)으로 수계(修禊)를 하였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금강11인현계의 후손이 숙종조 때에 수계(修禊)를 복원하여 활동하였던 장소이다.

이와 관련한 금사정의 일대기를 알려면, 1519년 기묘사화와 금강11인 현계의 결성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수계의 변천과정까지 알아야 금사정의 위상을 알 수 있기에 2회분의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금사정 현판

기묘사화 때에 금강11인현계의 역사적 기록은 관찬(官撰)의 금성읍지, 여지승람과 사찬(私撰)의 나주나씨 족보, 여양진씨 족보, 당악김씨 족보, 김선의 ≪시서유고≫, 나해봉의 ≪남간집≫, 나동륜의 ≪하촌유고≫, 김만영의 ≪남포유고≫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정문손의 ≪모효공문집(慕孝公文集≫, 나주나씨의 ≪충열공 족회안(忠烈公族會案)≫에는 금강11인현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에 나주 출신으로 태학관에서 공부를 하던 임붕 등 11인이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특히 1510년 진사시에 조광조가 장원하였을 때, 임붕은 생원시에 합격한 인연으로 11인의 소두(疏頭)가 되었던 것 같다. 11인의 유생들이 대궐 밖에서 자리를 깔고 상소를 할 때, 몽둥이로 쫓아버려 당시의 정치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서울에서 나주까지 맨발로 걸어 내려와 낙향한 후에 금강(錦江/영산강의 영산나루부터 회진나루까지의 강)을 좋은 날에 선유(船遊)하며 시주(詩酒)하고 강론(講論)하였다.

이러한 수계는 정유재란 전까지 이어오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영산강을 통해 침략한 왜적들에 의해 분탕질 당해 최초 건립한 정자와 관련 기록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남은 것은 시 몇 수와 회원들의 이름뿐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금사정에는 3개의 편액만 걸려있기도 하다.

<금강정(錦江亭)>이란 시인데, 이 시의 첫 구절이 ‘십재경영옥수연(十載經營屋數椽)’으로 되어 있어 ‘십재경영’이란 시조창으로 국악인들이 즐겨 불렸다. 그러나 이 시조창이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작가 미상이라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발견했다는 나주나씨의 《충열공 족회안》과 정문손의 《모효공문집》을 통해서 이 시는 정문손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게 된 셈이다.

기묘사화 당시 금강11인현계의 최초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고 각종 자료를 도표화 하였다.

<금강11인 현계 회원의 현황>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의 침략으로 소실되어 버리고, 아울러 금강계(錦江禊)의 수계(修禊) 자체가 중단됨으로 그 맥(脈)이 잠시 단절 되어 버렸다. 전쟁 피해 때문에 단절된 이유도 있겠으나, 11인 현계회원들이 그 당시 낙향할 때 벼슬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낙향 하였으나 훗날 다시 벼슬에 나아갔기 때문이다.

임붕(林鵬)은 1521년 중종 16년에 문과 급제하여 1533년 중종 28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된 기록이 중종실록에 나온다. 나일손(羅逸孫)은 벼슬이 직장(直長), 정호(鄭虎)는 벼슬이 음첨사(蔭僉使), 김구(金臼)는 벼슬이 우후(虞侯)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평생 낙향하여 은자(隱者)로 살지 않았으므로, 금강11인현계의 모임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여도 전체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후손들이 난정고사처럼 선대인들의 도의(道義)로 사귀는 그 뜻을 높이 받들어 금강11인현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그 모임의 형체가 금사정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유재란 이후 기록을 보면, 인조(仁祖)조 때의 시서 김선(市西 金璇)의 유집에는 ‘금강11인현계의 서문’과 ‘금강11인현계의 원안좌목’이 있고, 남간 나해봉(南磵 羅海鳳)의 유집에는 ‘동계후서(洞禊後叙)’가 있어 금강계회(錦江禊會)를 중수하려고 노력한 기록이 보이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35년 인조 13년 숭정8년 을해년 5월의 날에 처음 수계(修禊)의 일을 하니, 아, 어진 사람들이 여기에 모두 모였다.(중략) 하물며 나는 시서(市西) 어르신과 더불어 공융(孔融)과 이응(李應)이 마치 선조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던 것처럼 같은 계(禊)의 의(義)를 제대로 이어 더욱 다행스런 일이다.(중략) 무릇 봄과 가을에 강신(講信)을 할 때에는 술을 들면서 서로 즐기는데, 세상 사람들처럼 어깨를 두드리고 소매를 끌어 잡으며 높은 흥치를 삼는 것과는 자못 다르게, 충고를 해주고 연마를 하는 여가에 은근한 정의(情誼)를 나누며 위의(威儀)를 다짐할 따름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수계(修禊) 때에 다만 술 마시며 노는 것이 아니라 금강 11인현계의 의의는 시주(詩酒)와 강론(講論)에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현종-숙종 때에 남포 김만영(南圃 金萬英)이 낙향하여 수계(修禊)를 중수(重修)하려는 흔적이 금사정(錦社亭)에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의 편액되어 걸려있다. 금사(錦社)라는 말은 곧 금강결사(錦江結社)의 줄인 말이니 금강11인현계의 중수와 맥락을 같이한 말이다. 여기서 중수(重修)란 말은 건물을 고쳐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계칙(禊則)을 고쳤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금사정 수계서

금사정에 〈금강중수계서〉가 액자로 걸려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의 금강에 열한 명이 서로의 뜻을 모아 ‘금강’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옛날 난정(蘭亭)의 고사를 모방한 것으로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중종, 인조, 명종 대에 해당되는 아주 옛날의 모임일 뿐만 아니라 2백여 년에 걸쳐 오랜 문명을 누려온 태평성세였으며, (중략) 이때에 나의 고조부 형제[김두와 김구]를 비롯한 정자 임붕(正字 林鵬)과 직장 나일손(直長 羅逸孫) 등의 여러 선비들이 이 모임을 조직하여,(중략) 그런 연후에 연파(烟波, 박개)와 사암(思菴, 朴淳) 두 선생이 경조(耕釣)와 공퇴(公退)의 여가를 이용하여 여러 부로(父老)들과 함께 이의 모임을 지속하여,(중략) 1665년 만영(萬英)이 고향으로 돌아옴에 따라 향리의 여러 부로들이 나를 찾아와 나의 계부(季父)와 상상 정현국(上庠 鄭賢國)과 함께 옛날의 계를 다시 중수 했다는 내용의 한권의 책을 보여 주었다.(중략) 오늘의 여러 제공들이 백 년 전의 옛 일을 생각하여 선현들의 유지를 이어 받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중략) 그러나 봄가을로 모임을 갖던 그날에 술잔을 들고 높은 언덕에 올라 한 때의 풍류를 즐길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읍손진퇴(揖遜進退)의 예법과 동례하시(冬禮夏詩)의 절차를 밟아 옛날 선현들의 유학(遺學)을 이어 계승할 것인지 하는 두 가지의 문제에 대한 깊은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김만영의 〈금강중수계서〉를 통해 낙향하여 금강11인현계의 후손들 간 수계 계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 수정하면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주)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담양군과 화순군에 이어 나주의 주요 누정인 쌍계정, 석관정, 장춘정, 기오정, 영모정, 금사정, 만호정, 벽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집 간행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