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보다 사람, 걷고 싶은 광주(6) 경주 삼릉 가는 길
차보다 사람, 걷고 싶은 광주(6) 경주 삼릉 가는 길
  • 문상기,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9.2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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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시작과 끝이 있는 길

걷고 싶은 거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잘 만들어진 ‘걷고 싶은 거리’는 피곤한 도시민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거니와 지역의 랜드마크로 도시경쟁력을 제고할 수도, 관광문화자원으로 외지 관광객들을 유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 홍보하는 지자체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알려진 서울로7017, 인천 자유공원길, 부산 근대 역사의 길, 경주 삼릉 가는 길, 대전 시청 앞 가로수길, 강릉 월화거리, 미국 롬바드 스트리트, 하이드 스트리트, 기어리 스트리트, 헐리우드 블루버드, 로데오 드라이브, 산타모니카 블루버드 등 국내외의 거리를 직접 현장 취재할 계획이다. 그래서 이들 사례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분석해 광주만의 특성을 담은 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옛 것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것이 밝은 역사든, 어두운 역사든 간에 원형이 잘 보존된 유산은 관광자원으로서, 또 훌륭한 교육자료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무조건 부수고 새로운 건물들을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경주는 시간여행하기에 정말 좋은 장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취재 코스는 경주의 ‘삼릉 가는 길’이다.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시작과 끝을 엿볼 수 있는 경주의 대표적인 걷고 싶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이 아우르는 시간은 신라 천년의 역사다. 이 길 위에는 신라의 시작인 박혁거세 거서간이 탄생한 ‘나정’이 있고, 신라의 종말을 상징하는 ‘포석정’도 있다.

15일 오후 2시께 서남산주차장에 도착했다. 경주시청의 소개로 임희숙 해설사를 3시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1시간가량 일찍 온 셈이다. 그런데 안내소 창문을 열고 임 해설사가 “광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런다”고 하니 안으로 들어오라며 차 한 잔을 권한다. 모든 게 고맙다.

월정교~오릉~천관사지~포석정~삼릉 등으로 이어지는 ‘삼릉 가는 길’

경주시가 ‘삼릉 가는 길’을 조성한 때는 2011년이다. 경주시는 월정교~오릉~천관사지~포석정~삼릉 등으로 이어지는 7.8㎞의 ‘삼릉 가는 길’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관광 탐방길로 조성했다.

임희숙 해설사는 “조성 이후 2012년 4월께부터 지금까지 5년 5개월여 동안 매 홀수 토요일에 삼릉 가는 길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회당 평균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를 마신 후, 우리 일행은 ‘삼릉 가는 길’의 시작점인 월정교(月淨橋)로 이동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날씨다. 무덥지 않아 걷기에는 좋겠다.

▲ 월정교는 현재 누각 공사가 한창이다.

월정교에 이르니 현재 누각 공사가 한창이다. 임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월정교는 신라 궁궐인 월성의 남쪽을 감싸고 흐르는 문천(남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통일신라 최고 전성기의 가장 화려한 궁성교량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덕왕 19년 궁의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고, 교대와 4개의 교각이 남아 있었다.

임 해설사는 “이 교대와 교각을 기준으로 길이 66m, 폭과 높이가 각각 9m인 누각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지금 복원 중이다”면서 “밤이면 조명이 들어와 더 아름답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문천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신라 왕경 중심부로 월성과 계림, 첨성대, 고분지구, 왕경 등이 밀집해 있다”고 덧붙였다.

벽화와 길바닥에 이동로를 표시하는 등은 안내에 도움 줘

▲ 삼릉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표시등

천관사지(天官寺址)로 이동했다. 길 중간에는 ‘삼릉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는 벽화와 길바닥에 이동로를 표시하는 등이 있어 안내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만 벽화의 색이 바래있다는 점은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천관사(天官寺)는 김유신과 천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절이다. 큰일을 해야 할 장군이 술집 여인에 빠져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어머니의 충고에 더는 그 술집 여인을 찾지 않겠다고 김유신은 결심한다. 하지만 술에 취한 김유신을 습관적으로 술집 여인의 집으로 이끌었던 말의 목을 벤다. 그렇게 인연을 끊은 연인이 바로 천관이었다. 후에 김유신이 천관을 기리며 세운 절이 바로 천관사지란다.

 

▲ 천관사(天官寺)는 김유신과 천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절이다.

임 해설사는 천관사지에서 “천관은 술집 여인이 아니라 신녀로 추정된다”고 말한 뒤, “천관사지 곳곳에서 절터였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발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지금은 풀이 무성해서 보이지 않지만 탑을 받치고 있었던 8각기단부가 있는데, 내년에 복원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어 오릉(五陵)으로 향했다. 오릉은 들어가 보지 않았다. 임 해설사의 설명으로 대신했다. 임 해설사는 “탐방을 할 때도 오릉은 들어가지 않고 후문에서 설명만한다”면서 “오릉에는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 거서간을 비롯해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알영 부인이 묻혀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5기의 릉 앞에는 박혁거세 거서간을 모시는 숭덕전이 있고, 알영 부인이 태어난 알영정이 있다”고 덧붙였다.

▲ 박혁거세 거서간의 탄생지인 나정

나정은 박혁거세 거서간의 탄생지

오릉을 들어가 보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박혁거세 거서간이 태어났다는 나정(蘿井)으로 이동했다. 나정에 대해 임 해설사는 “원래 소나무 숲 가운데 조그만 비각이 하나 있고, 그 뒤편에서는 주춧돌로 보이는 네 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었고 가운데는 우물을 덮은 것으로 알려진 넓은 판석이 놓여있었는데, 2002년 나정의 비각을 다시 지으려고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팔각형의 기초를 갖춘 건물터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그는 “팔각의 건물, 유적과 유물로 보아 이곳은 제사터이자 신궁자리로 신라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경주시는 이 터의 건물지를 기반으로 신궁을 복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임 해설사는 나정 앞에서 한 축사를 가리키며 “저 축사는 명량스님이 지은 금광사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 육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는 양산재

다음은 양산재(楊山齋)다. 우리 일행은 옆 관리자의 집 마당을 통해 양산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심 후하게 보이는 할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 경주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육부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육부촌장은 경주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 등의 시조가 되었다. 바로 이 육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는 곳이 양산재다.

양산재를 나와 걸으면서 남산에 대해 임 해설사는 “남산에는 150여 곳의 절터, 130여 구의 불상, 100여 기의 석탑 등을 비롯해 석등 등 약 700여점이 산재해 있는 노천박물관이다”고 강조했다.

▲ 남간사(南澗寺) 당간지주(幢竿支柱)

남산은 노천박물관

남간사(南澗寺) 당간지주(幢竿支柱)에 이르렀다.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불보살의 위덕을 표시하는 깃발을 올리는 게양대인 당간의 양쪽을 지탱하는 돌기둥이다.

여기에서 임 해설사는 “남간사는 남산에 산재한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간마을 전역에서 사찰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면서 “어느 집들의 경우는 절의 초석과 주춧돌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부 기독교인들은 당간지주 끝에 있는 ‘+’를 보고 신라시대에도 십자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다른 곳에서 볼 수는 없는 특이한 형태이긴 해도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깎아낸 것이다”고 덧붙였다.

설명을 듣고 남간사 터를 가늠해보니 놀라울 정도로 넓어 보였다.

신라 최초의 궁궐터, 창림사지

다음으로 박혁거세와 알영 부인을 13세 때까지 모신 최초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진 창림사지(昌林寺址)로 이동했다. 창림사지는 발굴을 막 끝낸 후여서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창림사로 가는데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창림사지 3층 석탑으로 가는 중간쯤에 개를 키우는 농막이 있어서다. 유적이 있는 바로 인근에 개를 사육하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싶다. 역사 탐방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른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 창림사지 3층 석탑

임 해설사는 이곳에서 “창림사지 3층 석탑은 남산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큰 석탑으로 불국사의 석가탑을 닮았다”면서 “탑의 크기도 크기지만, 특히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진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상층 기단에 양각으로 새겨진 팔부중상은 아수라, 건달바, 천, 가루라만 남아있다고 한다. 또 아래 위치한 절터에서 팔부중상이 새겨진 쌍탑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탑에서 바라보니 주변 풍광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임 해설사가 절터에서 쌍귀부를 볼 수 있다고 해 한참을 내려갔으나 끝내 보지 못했다. 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란 탓이다. 아쉬웠다.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자결하다

신라 최초 궁궐터를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포석정(鮑石亭)으로 갔다. 내가 알고 있는 포석정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술잔을 띄워 연회를 즐기다가 후백제의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다. 하지만 임 해설사는 이와 다르게 설명을 해줬다. 임 해설사는 “오늘날 포석정은 군사적 성격 또는 제례적인 성격의 공간으로 재해석되고 있다”면서 “경애왕이 신하들과 술판을 벌이다 죽은 게 아니라, 왕비·궁녀·신하들을 데리고 남산산성으로 몸을 피하다가 이곳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자결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강조했다.

▲ 포석정(鮑石亭)

어떻든 구불구불한 돌 홈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을 띄우면 대략 12곳 정도에서 술잔이 머문다고 하니 당시의 과학기술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 포석정은 잘 꾸며진 정원에서나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묻어났다.

다시 우리 일행은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石造如來三尊立像)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정자와 벤치가 있는 태진지에서 잠깐 다리쉼을 했다. 하늘거리는 억새가 참 예뻤다. 이곳은 일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지마왕릉을 스치듯 보고 삼불사 옆에 있는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으로 갔다. 이동하는 도중 임 해설사는 “삼불에 가면 우담바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기대가 된다. 2.2m~2.75m 높이의 세 불상에 대해 임 해설사는 “가운데 있는 본존불과 정면에서 오른편에 있는 보살상은 아기 같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고, 묵중하고 단순화된 선 등으로 보아 7세기의 작품이고, 왼편의 보살상은 옷이 화려하고, 뒤에도 세밀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고 설명했다. 왼편의 보살상 팔에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해서 한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지스님이 찍어놓은 사진만 봤다. 잔뜩 기대했었는데 허탈했다.

▲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石造如來三尊立像)

소나무 숲이 일품인 삼릉

이제 마지막 코스는 삼릉(三陵)이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3명의 박씨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예전엔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냉골’이라고 불리었는데, 지금은 삼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한 사진작가가 삼릉의 소나무 사진을 찍어 널리 알려진 후로는 출사를 오는 사진작가들이 많다고 한다. 대체나 소나무 숲이 정말 아름다웠다.

▲ 삼릉은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3명의 박씨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도 천년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좋았지만 앞으로 복원된 모습을 드러낼 ‘삼릉 가는 길’이 더욱 기대가 된다. 언젠가는 꼭 새롭게 태어난 ‘삼릉 가는 길’을 다시 걸어보리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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