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4) 송흠과 박수량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4) 송흠과 박수량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9.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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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청백리의 상징적인 인물, 박수량

오늘은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네 번째 순서로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과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을 만나러 장성으로 갈 예정이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 해설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이 수고를 해주기로 했다. 매번 감사할 따름이다.

장성역에서 김세곤 원장을 만나 장성 삼계면 내계리에 위치한 관수정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일부 참여자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관수정으로 들어갔다.

관수정(觀水亭)은 송흠이 1540년에 지은 정자로 ‘물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관수정은 방 한 칸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수정 아래에는 개천이 있는데, 이 개울은 용암천이다.

송흠의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이요,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耆社,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趙元紀)와 같았고, 여러 번 1품 품계에 올랐다. 공이 매양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新迎)하는 말(馬)이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사람들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청백하고 검소...‘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려

김세곤 원장은 우리 일행을 관수정 마루로 올라오게 하고는 먼저 관수정이라고 써진 현판에 대해 설명했다. 전주 출신 서예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마루 기둥 위에는 대략 30여개 정도의 편액들이 붙어 있었다. 편액들에 대해 김 원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마루 기둥 위에는 대략 30여개 정도의 편액들이 붙어 있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이 편액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방 바로 위에 붙어 있는 편액에는 원운이라고 적힌 편액과 근차(謹次)라고 적혀 있고 ‘문인 홍문응교 면앙 송순’이라고 적혀 있다. 왼편에는 편액이 세 개다. 하나는 송흠의 아들 익경, 두 번째는 하서 김인후. 세 번째는 모재 김안국이 쓴 한시이다. 대들보 앞에는 임억령, 양팽손, 그리고 내역을 잘 알 수 없는 편액이 있다.

김 원장은 계속해서 편액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대들보를 지나서 한 곳에는 홍언필, 성세창, 김익수, 신광한, 안처함 등의 이름이 있고, 대들보 맞은편에는 ‘관수정기’라고 적힌 편액이 있다고 한다. 관수정기 맨 마지막 부분에는 지지당 주인 자서(自敍)라고 적혀 있다고 덧붙인다. 그 옆에는 소세양이 쓴 편액이 있고, 또 정사룡, 이문건, 나세찬, 정희홍, 노극창, 정순명, 강종수, 오겸, 유부, 유사, 박우, 송호림 등의 이름이 적힌 편액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편액의 글이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되어 있어 혼자 왔다면 그냥 허투루 봤을 편액들이었을 텐데,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눈에 들어왔다.

김 원장은 편액에 대한 설명 끝에 “이들이 모두 송흠 선생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송흠의 위상을 알 수 있다”고 상기시켜준다.

따로 보관되어 있는 옛 관수정 현판

이제 송흠의 묘소로 갈 참이다. 묘소로 향하는 참에, 김 원장이 “옛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면서 문간방처럼 보이는 방문을 열었다. 대체나 옛 현판이 벽에 걸려 있었다. 김 원장은 “이 현판이 제각의 벽 옆에 기대어 있었는데 문중에 말해서 지금의 자리에 보관되게 됐다”고 말했다. 순간 이 옛 현판이 관수정의 현판으로 다시 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옛 현판이 관수정의 현판으로 다시 걸렸으면

이어 재실 건물과 바로 닿은 골목에 들어서니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왔다. 이 계단 위해 송흠 선생의 묘가 있다고 한다. 산 정상에 이르니 세 개의 묘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먼 위치에 거북이 등과 구름과 용이 머리에 얹어진 비석이 있는 묘가 바로 송흠 묘소다.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가 있다.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 무덤 옆에는 거북이 등위에 세워진 묘갈비가 있다. 묘갈비의 윗부분에는 전서체로 ‘판중추부사 겸 세자이사(世子貳師) 지지당 송선생 묘갈명(墓碣銘)’이라고 적혀 있다.

김 원장은 “묘갈명은 명재 윤증(尹拯: 1629-1711)이 지었다. 그의 제자인 송흠의 7대손 옥강 송명현 (1659-1743)의 부탁을 받아서 1683년(숭정기원후 56년)에 지은 것이다”고 말한 뒤, “묘소에 이 비가 세워진 것은 1975년이다. 그래서 묘갈명의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맨 앞의 비석 없는 자그마한 묘가 평양할머니 묘다. 매년 제향을 할 때 지지당 선생과 함께 모신다”고 말한 뒤, “이 할머니는 송흠과 평생 산 후실 내지 애첩이었음이 분명하고, 기생으로 추측이 된다. 주역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송흠의 묘에 간단하게나마 예를 표한 뒤, 다시 관수정으로 내려왔다. 김 원장이 이때 “잠시 설명이 빠진 게 있다”면서 관수정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비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가훈비란다.

이 비는 앞면은 한자로 뒷면은 한글로 되어 있었다. 비 앞면에는 가훈(家訓)이라고 적혀 있다. 이 가훈은 송흠이 87세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김 원장은 “사람됨은 다만 충과 효에 있을 따름이다는 게 가훈의 핵심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에 쫓겨 건너뛰었던 신도비가 눈에 띈다.

송흠 신도비

김 원장은 신도비 앞에서 “비문은 윤증(1629-1711)이 쓰고 시장(諡狀, 시호를 내려주라고 청하는 글)은 대제학 박태상(1636-1696)이 지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신도비와 묘갈비의 내용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묘갈비를 그대로 신도비로 사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기영정(耆英亭)이다.

기영정은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 있다. 기영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관수정이 보인다.

기영정, 지지당 송흠을 위하여 관수정 건너편에 지은 정자

기영정의 안내판에 따르면 기영정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에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 송흠을 위하여 관수정 건너편에 지은 정자이다. 병자호란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철종 7년(1856)에 송인수의 10대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하여 고쳐지었다.

지지당 송흠을 위하여 관수정 건너편에 지은 기영정

김 원장은 “기영정은 현판이 두 개이다. 하나는 송인수의 후손인 송겸수가 쓴 기영정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신석희가 쓴 현판이다”고 말한 뒤, 정자 마루에 올라 “편액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송인수와 송흠의 기영정 시 등이 있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기영정 중수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맨 오른편에 ‘기영정 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가정 계묘 9월초라는 글씨가 있으며 ‘천고 호남’으로 시작하여 ‘만불류’로 마무리하면서 지지당이라는 글씨가 있다. 그 다음에는 경제(敬題) 원운(元韻)이라고 적혀 있고 ‘호해유령’에서 시작하여 ‘만세류’로 한시가 끝난다. 그 다음에 감사 송인수, 시(諡) 문충, 호 규암이라고 적혀 있고, 이어 참판 김우급이 기영정에 와서 느낀 소회를 적은 시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해줬다. 설명을 들어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여기까지 보고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됐다. 우리 일행은 근처 가까운 삼계면에서 김치찌개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다시 오후 일정으로 우리 일행은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청백리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묘소로 발길을 옮겼다. 백비(白碑)로 유명한 곳이다.

황룡면에 들어서니 오른 편에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이 있다. 지난번에 탐방을 했던 곳이어서 반가웠다.

아곡 박수량 신도비

아곡 박수량(1491-1554년)은 조선 성종 22년 장성 황룡에서 태어났다. 24세에 과거급제를 하고 고부군수, 병조참지, 동부승지, 호조참판, 예조참판 형조참판, 우참찬 좌참찬, 호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벼슬과 공직은 물론 이름도 새기지 않은 백비는 청백리의 상징

선생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길이 전해지는 이유는 청백리의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벼슬과 공직은 물론 이름도 새기지 않은 백비는 청백리의 상징이다.

김 원장은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나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봤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생계를 겨우 연명할 뿐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였다”고 들려준다.

묘소 입구에는 백비를 찾은 기관과 단체가 표기된 알림판이 있었는데,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00여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이기에 여기에 온 기관과 단체가 모두 정말로 투명하고 깨끗하기를 소망해 봤다.

또 입구에는 ‘아곡 박수량 백비’라고 제목이 붙은 안내판과 ‘청백리 시(諡) 정혜공 박수량 선생 백비 입구’라고 적힌 표시석, 그리고 경계석으로 둘러진 비석이 하나 있었다.

아곡 박수량의 백비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는 너무나 유명한 백비가 세워져 있었고, 뒤에는 소나무로 둘러져 있었다. 묘소 오른 편에 묘비가 하나 있고, 5-6 미터 떨어진 곳에 망주 두 개와 문인석 두 개가 있었다. 또 백비에는 패인 흔적이 여럿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6.25때 총탄 자국이다”고 말해줬다.

김 원장의 말에 따르면 박수량은 평소에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초야에서 태어나 임금의 후한 은총으로 판서 벼슬에 까지 올랐으니 그 영화는 과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 행동을 삼가 하여 시호도 주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시호도 주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김 원장은 “박수량이 후손에게 당부한 이 말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시호를 받고 비석도 세워진 것이다”면서 “박수량은 별세 후 250년이 지난 1805년에 정혜공이란 시호를 받았고, 묘비는 박수량 사후 330년 지난 1888년에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아곡 박수량 묘비

이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량의 후손이 박수량의 말을 250년 이상 지킨 점은 대견스럽다”고 덧붙인 뒤, “묘지문이 읽지 못할 정도로 훼손이 심하지만, 끝에 하서 김인후의 이름이 남아 있어 하서가 쓴 묘지명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량 묘소를 내려오면서 입구에 세워진 경계석에 둘러진 비를 살펴본다. 자세히 보니 신도비이다. 신도비 맨 위에는 전서체로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정혜박공 신도비명’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전서는 의정부 우찬성 이용원이 썼다. 신도비가 세워진 때는 정해 3월이다. 정해년을 서기로 환산하여 보니 1887년이다. 신도비는 경연관 서연관 송병선이 글을 짓고 공조판서겸 의금부사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청백당(淸白堂)으로 갔다. 청백당은 홍길동 테마파크 내에 조성된 한옥이다. 이 한옥은 명종임금이 하사하였다는 99칸 집을 재현하여 지은 것인데 현재는 일반인들의 숙박시설로 활용되고 있었다.

아곡 박수량 유허비

청백당 입구에는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 안내도, 유허비와 하마석 그리고 ‘아곡 박수량 선생과 청백당’ 안내판이 있었다.

김 원장은 “유허비와 하마석은 원래 다른 곳에 있었는데, 한옥이 조성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며 “유허비 앞면은 ‘정혜공 아곡 박선생 유허’라고 적혀 있고, 뒷면은 유허비 음기(陰記)가 한문으로 쓰여 있다”고 설명했다.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은 왠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듯 보였다. 홍길동과 청연당의 이미지가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은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송흠과 박수량은 효와 청백리의 표상이다. 특히 송흠과 송익경은 부자 청백리로 유명하다”면서 “청백리정신도 호남정신으로 계승되어야 할 훌륭한 자산이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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