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누정(1) 기오정(寄傲亭)
나주 누정(1) 기오정(寄傲亭)
  •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승인 2017.09.14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한 마음을 경계하다

기오정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74-1번지인 소위 영산강 구진포 강가에 있다. 이 정자는 반남박씨 15세 박세해(朴世楷, 1615-1698)가 1669년(현종10)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후 1745년(영조21), 1934년, 1981년에 각각 중수하였고, 2008년 4월11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박세해의 선대는 사간 박소(朴紹), 대사헌 박응복(朴應福), 대사성과 나주목사였던 박동열(朴東說) 등이다. 박세해는서울에서 태어나 나주임씨 임위(林瑋)의 딸과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다가 늘그막에 병 치료를 위해 처가 마을인 나주 회진으로 낙향하여 기오정을 건립하였다.

기오정이란 현판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친필로 1762년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정자에 들려 기오정이란 현판 글을 썼다고 전해온다. 기오(寄傲)라는 말은 직역하면 ‘오만한 마음을 보내다’인데, 내 마음안의 오만함을 보내버리므로 오만함을 벗어나는 수양(修養)의 한 방편이다.

그래서 이를 의역하면 ‘세속을 떠나 초연한 자유인의 경지를 마음껏 펼친다’는 말이 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한 마음을 보내버리니,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방의 편안함을 알겠네/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데서 기오(寄傲)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기오정은 정면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건축구조가 서쪽 2칸은 마루로, 동쪽 2칸은 두 개의 방으로 되어 있고 사면은 벽과 출입문으로 막혀 있다. 이는 사방이 탁 트여 풍류를 읊는 정자와 다른 점인데, 풍류보다는 공부를 가르치는 학숙(學塾)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오정이 유명해진 것은 박세해(朴世楷)의 결혼 60주년인 회혼연을 기오정에서 개최했기 때문이다. 박세해의 셋째아들 태항(泰恒, 1647-1737)이 1687년(숙종13) 문과 급제하여 1687년부터 숙종, 경종, 영조조까지 주로 궁궐에서 벼슬을 하였고, 승정원일기 숙종19년 9월11일 조에 ‘부모가 모두 신병이 있으므로 체직(遞職)해 줄 것을 청하는 박태항의 상소’, ‘부모가 모두 살아있고 80세가 넘은 박태항에게 가자(加資)하라는 전교’, ‘박태항을 필선(弼善/세자의 스승, 정4품)으로 삼다’ 라는 기록과 기오정 기문(記文)에 박태항의 부모가 8순에 회혼연(回婚宴)을 하였다는 기록과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1693년(숙종19)에 기오정에서 회혼연을 개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오정 시판은 대부분 박세해의 회혼연 축시인데, 그 시운은 여(餘), 거(居), 려(閭), 허(虛), 여(如) 등이다. 게시된 시판에서는 원운시라는 시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종질 박태초(朴泰初)가 지은 축시 2수 중에 제1수의 시문 내용으로 보아 정자 주인인 박세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들어 있어 이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박태초의 시판 제1수

삼세득년이백여(三世得年二百餘) 부인팔십역동거(夫人八十亦同居)

관승구악광문호(官承舊渥光門戶) 물대신은용리여(物帶新恩聳里閭)

해로중뢰인유기(偕老重牢人有幾) 제아등방세무허(諸兒登榜歲無虛)

전가수복쟁등하(傳家壽福爭騰賀) 풍수고생각현여(風樹孤生卻泫如)

 

삼세대에 2백여 살의 나이를 먹어 가는데

부인과는 팔십살이 되도록 또한 함께 살고 있네.

예전의 두터운 은총으로 벼슬을 이어 문호가 빛나는데

새로운 은혜로 깃발을 띠로 두른 마을에는 정려가 솟았네.

부부가 해로하여 회혼을 맞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 런지

여러 아들들 과거 급제가 해마다 끊이지 않네.

장수와 복을 가문에 전하니 다투어 경하를 하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리운 정에 도리어 눈물 날 것 같구나.

 

위 시를 보면 박세해의 종질 박태초가 축시를 쓰면서 숙모뻘 되는 이에게 부인(夫人)이란 호칭은 맞지 않으며 전체 시문 내용도 박세해가 회혼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이 시를 원운 시로 본 것이다.

기오정에 회혼례의 축시를 판각하여 게시한 때는 1939년 후손 박정서에 의해서였다. 거의 240여년 후에 축시를 시판으로 제작하였으니, 당초 시지(詩紙)를 분류 판독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듯하다. 여타 시는 모두 ‘삼가 차운하다[敬次]’라는 단어가 있어 원운을 차운한 시임을 알 수 있다. 박정서의 중수기에도 25명이 축시를 읊었다고 하였다.

대략 다음과 같다. 경주이씨 이한좌, 연안이씨 이석형, 재종제 박세채, 박세집, 삼종제 박세당, 박세준, 종질 박태초, 삼종질 박태상, 족질 박태창, 증손자 박사신, 진사 박풍서, 후손 박정서, 박갑서 등이다. 그리고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약재 유상운(約齋 柳尙運), 한포재 이건명(寒圃齋 李健命), 창계 임영(林泳), 시은 이임한(李任漢), 반곡 이덕성(李德成), 선산 김덕기(金德基), 대사성 송징은(宋徵殷) 군수 조귀상(趙龜祥), 현감 허숙(許琡), 문성 유종신(柳宗臣), 제월당 권성(權𢜫) 등도 축시로 화답하였다.

최석정(1646-1715)은 영의정이며 노론의 영수였고, 이건명(1663-1722)은 나로도 유배지에서 졸하였는데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伸寃) 되었고 송징은(1652-1720)은 박세채의 문인인 것으로 보아 박세채(1631-1695)와 당대 고위직 교유인물들의 축시가 답지한 듯하다. 그러므로 외부인사인 한포재 이건명의 축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포재 이건명의 축시

적선고문경유여(積善高門慶有餘) 금성천재접선거(錦城千載接先居)

춘훤색요중뢰석(春萱色耀重牢席) 채복영생사마여(彩服榮生駟馬閭)

열정의비은영석(列鼎衣緋恩永錫) 다남득수어비허(多男得壽語非虛)

이교성사전래세(已敎盛事傳來世) 갱견신희일화여(更見新禧日華如)

 

선을 쌓은 높은 가문으로 여경(餘慶)이 있어서인지

천년 금성에서 조상을 가까이하며 사네.

그대의 부모는 회혼 연회석에서 얼굴빛이 빛나고

색동옷의 효자 때문에 마을에 사마(駟馬)가 오는 영광이 생기네.

비단 옷에 진수성찬 맛보는 신분을 오래도록 은총으로 받으니

아들 많아야 장수한다는 말 허사가 아니네.

이미 성대한 일로 하여금 후세에 전해지게 하였는데

또 새해의 복을 만난 것 같이 햇살처럼 화려하네.

창흥의숙(昌興義塾)과 고려대학교 설립이 기오정에서 비롯되다

한편, 기오정은 오늘날 창평초등학교 전신인 창흥의숙(昌興義塾)과 고려대학교가 만들어지는 최초의 마인드가 기오정에서 싹이 텄음을 알 수 있는 숨은 향토사를 말하고자 한다.

기오정의 주인 박세해의 8세손 박무양(朴武陽)의 둘째 사위가 창평 출신 고정주(高鼎柱 1863-1933)인데, 신랑측에서 선을 보려고 기오정 옆의 박무양 댁을 가을에 방문하였다. 이때 박무양의 딸이 감을 따기 위해 감나무에 올라가 있었는데, 신랑 될 사람의 어른이 그 아래(치마폭)를 지나갔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가 혼사가 이루어지고 박무양은 사위 고정주를 불러 기오정에서 공부를 하게 하여, 마침내 1891년(고종28)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기오정의 정자 구조를 보면 기숙(寄宿)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정주는 기오정에서 공부를 하여 문과 급제 하였으니, 기오정 정자에서의 교육에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고창에 사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인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건국 후 부통령)를 사위로 맞이하여 기오정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하였다.

훗날 고정주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 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1980년 창평초등학교 전신인 창흥의숙(昌興義塾)을 건립한 것은 기오정에서 학숙(學塾)했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위 김성수를 기오정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함으로 김성수도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으며, 그 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 학교가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으니, 이러한 교육의 터를 만들려는 ‘마인드’는 기오정에서 공부한 체험의 결과에서 나온 것 아니었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는 구전되어오는 이야기인데, 오늘날 기오정 지킴이 박천수(朴天秀) 씨는 족보를 펼쳐놓고 박무양의 사위 고정주와 고정주의 사위 김성수의 대목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가문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문화해설사처럼 말해줬다.

지역 학숙(學熟) 역할로 기오정에서 공부를 하였던 인재들이 대거 소과와 대과를 합격하였으니, 그중에 반남박씨측만을 추려보면, 문과급제에 박태항(1687), 박사제(1723), 박필간(1735), 박혼원(1743), 박종겸(1785), 박창수(1861), 박심수(1812) 등을 들 수 있고, 소과합격자로는 박필원, 박필정, 박태형, 박필조, 박필한 등을 들 수 있다.

영산강 줄기에 자리한 나주 누정에 관심 필요

기오정이 건립된 지 340여년이 지났다. 전남지방에 수많은 정자가 거의 대부분 영산강 본류와 지류 인근에 있다. 나주 8정이니 영산강 12정이니 하는 말은 있지만,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이름난 정자가 관리 부족으로 없어진 정자 또한 많다. 나주 지역도 현존하는 정자가 44개인 반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자가 무려 180개나 된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정자를 중심으로 3정, 8정 또는 12정을 다시 선정하여 관광상품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도 기오정 바로 앞으로 영산강이 흐른다. 아마 옛 선조들은 선비정신을 함양하려면 스스로 “마음속의 오만함을 저 영산강물에 흘려 보내버리라[寄傲]”고 후세 사람에게 웅변하려고 기오정 현판을 매단 것 같다.

한편, <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는 담양군과 화순군에 이어 나주의 주요 누정 인 쌍계정, 석관정, 장춘정, 기오정, 영모정, 금사정, 만호정, 벽류정 등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집 간행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