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7)
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7)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9.0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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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담양군 미암박물관에서 ‘중양절에 작은 술자리를 열고’란 전시물을 보았다. 1574년 9월9일, 미암 부부와 가족들은 국화주를 마시며 중양절을 즐겼다. 이번에는 가비(歌婢) 죽매와 말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뜯게 하였는데 아들 경렴과 사위 윤관중이 차례로 일어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니 미암과 덕봉은 아주 즐거워했다. 이 날은 시회(詩會)도 가졌는데, 먼저 윤관중이 시를 지었다. 1)

경사스럽게 어버이 모시나니

가을바람에 해 비치는 때로다

거문고 노래 소리에 흥취이니,

이 모임 백년을 기약해 보네

이어서 경렴이 차운하였다. 운은 2구의 시(時)와 4구의 기(期)이다.

부모님 집안에 함께 계시니

색동 옷 입고 춤추는 이때

우리 집의 무한한 이 즐거움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기약하리.

색동옷은 초나라 노래자(老萊子)가 70세의 나이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입었다는 옷이다. 유경렴도 그랬을까?

다음은 미암이 시를 지었다.

대궐에서 은총을 받은 날

노란 국화를 술잔에 띄우네.

한 집에 우리 대여섯 가족

함께 태평시절 기약 하누나.

끝으로 덕봉이 읊었다.

옛 적 남북으로 갈려 살 때는

어찌 이런 날 생각이나 했으랴.

맑은 가을 멋진 절기에 모이니

천리 길 서로 기약한 듯하네.

덕봉은 미암의 유배살이 19년을 회상했다. 미암은 함경도 종성에서 17년, 충청도 은진에서 2년을 살았고, 덕봉은 전라도 담양에서 살았다.

▲ 미암박물관에 있는 ‘중양절에 시를 짓다’ 게시물

미암 박물관을 나와서 연계정(漣溪亭)으로 간다. 미암은 집 앞에 흐르는 냇가를 ‘연계(漣溪)’라고 이름 지었다. 1575년 12월18일자 『미암일기』에 나온다.

▲ 연계정

1575년 5월에 유희춘은 명종 비 인순왕후 상(喪)의 졸곡 때 고례(古禮)에 따를 것을 주장하는 신진 사림과는 달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로 하자는 영의정 권철과 영부사 홍섬 등의 입장을 따르다가 후배 사림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때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 9월에 유희춘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창평현 수국리(담양군 대덕면 장산리)로 내려왔다.

1575년 9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미암의 낙향이 기록되어 있다.

유희춘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이가 동료들과 의논하기를, ‘유공(柳公)은 글을 읽은 군자이고 이후백과 김계휘는 시무(時務)에 익숙하고 전고(典故)에 밝은 이들이니, 이들이 조정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심의겸과 김효원이 당을 나눈 형적이 이미 드러났고, 김계휘 등은 모두 선배로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서로 잇따라 조정에서 떠나가자 김효원이 더욱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한편, 1577년 3월에 선조는 미암에게 홍문관 부제학을 제수하고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려준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2) 미암은 선조의 어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4월말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몸이 아파서, 5월11일에 누워서 사직서를 올렸다. 이후 그는 병이 심하여 5월15일에 별세했다.

미암이 별세하자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 졸기를 남겼는데 혹평이다. 3)

전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이 죽었다. 유희춘은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서사(書史)를 다 외우고 성품이 온화하여 임금이 매우 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세제민할 재주와 곧은 말을 하는 절조(節操)가 부족하여 언제나 경연에서는 문담(文談)뿐이었고, 현실의 폐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부족하다 생각하였다. - 1577년 5월

미암이 별세한 지 8개월 뒤인 1578년 1월에 송덕봉도 세상을 떠났다. 4)

▲ 미암 부부 묘소

그동안 세상은 미암에 소홀하였다. 제자 허봉(1551∼1588)이 쓴 미암 행장도 남아있지 않고 연보조차 꾸며지지 않았다. 5) 『미암집』도 한말의 거유(巨儒) 기정진(1798∼1879)이 꾸몄을 정도였다.

1) 윤관중은 해남윤씨 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손자로 선전관 벼슬을 했다.

2) 선조실록 1577년 3월27일

3) 선조실록 1577년 5월15일과 선조수정실록 1577년 5월1일 자에는 유희춘의 졸기가 실려 있다.

4) 미암 부부는 담양군 대덕면 비철리에 쌍분으로 묻혀 있다. 묘지 오른 편 아래에는 첩 방굿덕이 잠들어 있다.

5) 허봉은 동인의 영수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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