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배운 소학교 책
어머니가 배운 소학교 책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8.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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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나도록 책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어오다가 더는 미룰 수 없어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여 일을 마쳤다. 책 정리에 여러 날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책 한권을 집어들 적마다 그 책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떠올라서다.

책 한 권마다에 얽힌 사연, 추억, 느낌이 되살아나 목차를 보기도 하고, 밑줄 친 대목을 읽으며 그 날들을 기억하다보니 오래 걸리게 되었다. 어떤 책은 하도 오래 되어서 누렇게 바래다 못해 수십 년 세월에 그을려 책을 펼칠 때 책장이 바스라져 떨어지기도 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 같은 책이 그랬다. 책장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그런 책들은 조심스레 아귀를 맞추어 한 쪽에 소중히 꼽아놓았다.

두어 해 전 가지고 있던 책들 중 반 정도를 트럭으로 실어 시골 학교에 기증하고, 지난 봄에는 책을 좋아하는 동생한테 큰 박스로 7개를 보냈는데도 아직도 책이 우리집 살림의 반도 더 차지할 정도다. 아내의 등쌀도 있는데다 오래된 책 냄새가 역해 언젠가는 큰 맘 먹고 반 정도는 다시 줄여야 할 것 같다.

아내는 성서와 사전류만 남기고 다 어디에 기증하라고 하지만 평생 나와 함께 지내온 책들을 버리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책에도 혼이 있어 그 혼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데 어떻게 책들을 다 없앤단 말인가. 일단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큰 맘 먹고 또다시 없애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책을 정리하다 그동안 깜빡 잊고 지내던 책들을 발견하고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책 들 중에는 할아버지가 보시던 증조할아버지의 책들도 몇 권 있다. 인쇄된 책이 아니라 손수 쓴 책이다. 한문으로 쓰신 것들인데 그 정확한 행 맞춤, 정갈한 먹 글씨가 대저 공부하는 사람이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마치 활자로 찍은 것 같은 글자 한 자 한 자를 공들여 쓴 그 학문하는 정성과 열정이 경외스럽다.

나는 가보처럼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잘 보관했었는데 책들에 치여 숨겨져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이다. 이 책들은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없지만 웃대 할아버지가 남긴 자필본이어서 가문의 유산으로 아들에게 물려줄 심산이다. 조상의 손때가 묻은 책을 아들이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 손길만은 느낄 수 있으리라.

내가 고이 간직해온 책은 어머니가 ‘국민학교’ 시절에 배운 교과서다. 엄청 오래된 책이어서 고서로 분류해도 좋을 책이 아닐까싶다. 이번에 찾게 된 그 책을 마치 살아 있는 생물마냥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착잡하게 하는 이 책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책 이름은 <소학국어독본(小學國語讀本) 권12(卷十二)>.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책이다. 표지 안 쪽에 ‘OO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이라고 어머니가 책 뒷장에 펜으로 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교과서 내용을 대강 훑어보니 일제가 동남아를 침략하던 시절의 이야기들도 쓰여 있다. 판권에 인쇄된 ‘소화 18년 7월 10일’ 발행 일자로 미루어 74년이나 된 무척 오래된 책이다.

나라를 잃고 글을 잃고 일제의 식민지가 된 백성의 마음이 어땠을까. 책의 어느 페이지 여백에는 연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가 낙서처럼 세 번이나 한자로 쓰인 것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저 나라 읽은 설움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10대의 어린 소녀가 연필심을 꾹 눌러가며 교과서 여백에 쓴 朝鮮獨立萬歲. 나는 몇 번이고 희미한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그 시절을 짐작해보려고 했다.

어머니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요즘으로 치면 여고 2,3학년이나 되었을까,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것은 일제가 동네마다 찾아다니며 어린 소녀들을 차출해갈 계획이라는 면사무소의 친척되는 직원이 미리 귀띔해주어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 것이라고 들었다.

지금 사람들은 그 시절 식민지 백성들의 암울한 삶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세대는 그런 신산한 삶을 살아왔다. 이 낡은 책이 그 증거다. 책의 갈피 여기저기에 쓰여 있는 낙서들이 그 증거다. 아니, 더 격한 증거가 있다. 책갈피에 끼여 있는 손바닥만한 흑백 사진 한 장. 어머니 아버지의 결혼사진이다.

아버지는 숱 많은 머리를 깔끔히 빗은 얼굴에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신사복을 입고 상의 왼쪽 주머니에 조화 같은 모양의 장식물을 꽂았다. 어머니는 머리에 꽃으로 장식한 둥근 화관을 쓰고 흰 비단 저고리에 꽃무늬가 얼비치는 긴 치마를 입고 아버지의 오른팔을 끼고 있다. 두 분 다 하얀 장갑을 끼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두 분의 모습이 자못 긴장된 표정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우리 형제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드라마의 단초가 되는 셈이다. 아, 사진은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얼마나 긴 이야기를 하는가. 일제강점기 치하에서의 결혼식 사진. 색바랜 사진 한 장에 담겨 있는 애틋한 모습.

내가 가진 많은 책들도 어머니가 일제시대 배웠던 소학교적 교과서 갈피에 우연히 끼여 있던 이 사진보다 더 생생히 삶의 이야기를 전해주지 못한다. 그동안 이 책과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는지 하고 늘 안타깝게 그리고 있었는데 책 정리하는 중에 되찾았다.

다음 번에 책을 정리할 때는 책갈피마다 잘 들여다보아야겠다.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이 책 속에 더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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