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중공업 피해 소송, 2·3차 모두 ‘승소’
미쓰비시중공업 피해 소송, 2·3차 모두 ‘승소’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8.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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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피해 관련 원고 측 손 들어줘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누리집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영화 ‘군함도’가 개봉하면서 일본의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결과가 관심을 끌고 있다.

광주지방법원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2차, 3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측인 일제강점기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2차 소를 제기한지 3년 6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나온 것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지난 11일 미쓰비시 중공업 피해자 2차 소송과 관련 1차 판결 결과 미쓰비시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배상’ 명령을 내렸다. 앞서 8일에 열린 3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부 승소한 3차 소송에서는 김영옥 씨에게 1억 2000만원, 고인이 된 최정례 씨의 조카 며느리 이경자 씨에게 325만 6684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도록 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재판 지연작전 펼쳐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 사건은 10대 초반 어린 나이의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으로 내몰며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대지진으로 인해 6명의 소녀들은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피해자들은 지난 2012년 양금덕 외 4명이 1차 소송을 제기했고, 2014년 김재림 외 3명이 2차 소송, 2015년 김영옥 외 1명이 3차 소송을 제기했다.

그동안 미쓰비시는 소송과 관련해 재판 쟁점과는 무관한 사소한 이유를 들면서 소장 수령을 거부하는 등 재판 지연작전을 펼쳐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 이미 연로한 피해자들은 세월이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져갔고, 요양병원 신세를 져야하는 등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1차 소송은 광주지법 승소, 광주고법 승소 이후,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최근 판결이 나온 2차 소송과 3차 소송의 원고들은 양영수, 오철석, 심선애, 김재림, 김영옥, 이경자 씨 등 6명이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대지진, 공습 상황 속 혹독한 노역생활

1929년생인 양영수(89) 씨는 광주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44년 담임선생이었던 야마모토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공짜로 할 수 있다. 좋은 학교도 갈 수 있다”고 일본에 갈 것을 권유 받았다.

양영수 씨는 “내가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덜 괴롭힐 것이 아니냐. 내가 좀 힘들더라도 집안이 좀 편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일본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양영수 씨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양 씨가 광주역에서 출발해 여수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니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나고야에 도착한 양영수 씨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하루 종일 비행기에 들어가는 부속품을 만드는 노역생활을 겪어야했다.

온기라고 없는 기숙사에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밤마다 공습 때문에 이불을 둘러쓰고 방공호로 뛰어다니기 바빴다. 한 달에 한번 할 수 있었던 목욕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목욕하고 난 뒤에 200여명을 한꺼번에 들어가게 했다.

1945년 나고야 공장 가동이 어렵게 되자 도야마로 끌려갔다. 양영수 씨는 도야마에서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미쓰비시 중공업 근로정신대, 위안부로 오해 받기도

1930년생 심선애(88) 씨 역시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일본에 가게 됐다. 집결지였던 광주공원에 모여 신사에서 참배를 한 뒤 일본 군인의 인솔 하에 줄을 지어 이동했다.

심선애 씨가 여수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모노세키였다. 나고야 시내에 도착한 이후 일본인이 변두리 기숙사까지 인솔했고, 얼마 뒤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에 배치되어 고된 작업에 시달려야 했다.

지저분하고 열악했던 기숙사 생활과 제대로 된 식사량을 제공하지 않는 탓에 배고픔에 굶주려가며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월급은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1944년 12월 7일 나고야 대지진으로 광주에서 같이 간 2명이 건물더미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1945년 해방소식을 듣고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 갔다 온 여자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로 취급했기 때문에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대법원 계류, 정부 적극적인 대응 나와야

최근 광주지방법원 판결과 관련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판결은 미쓰비시 측의 억지 주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것이자 일제의 한반도 불법 점령 과정에서 자행한 식민 범죄와 인권유린에 철퇴를 가한 한국 사법주권의 승리다”고 밝혔다.

이어 “2015년 원고 3명(김재림, 심선애, 양영수)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199엔을 지급해 우롱한 것에 대해 보기 좋게 승소 판결로 되갚은 역사적 쾌거다”고 발표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 시절 외교부는 일제 강제 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관련해 기존 판결에 부정적 견해를 담는 자료만을 뽑아 만든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며 “대법원에 계류된 있는 사건을 언제까지 손에 쥐고 있을 셈인가”라고 비판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이끌어온 이국언 대표는 “대법원에서 오랫동안 계류 중인 모습자체가 전법기업에게는 기존의 판결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며 “일본 정부와 기업은 똘똘 뭉쳐서 막아내려고 하는데 본의아니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로 비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대표는 “우리 정부차원에서는 중국정부가 하는 것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며 “중국의 경우 일본 피해와 관련 소장이 접수됨과 동시에 외교부측에서 공식 성명서를 발표한다. 일본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 강력한 외교적 힘을 실어준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최근 소녀상 건립과 관련해서도 부채를 덜고, 힘을 보태주는 작업으로 의미가 있지만, 소녀상 건립으로 모두 것을 담아버리려고 하면 상당히 문제가 될 거라고 본다”며 “단순히 소녀상 건립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

한편,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는 광주·전남지역에서 150여 명, 대전·충남지역에서 150여 명 등 약 300명에 달하고 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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