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4)
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8.1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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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별세하고 윤원형이 축출 당하자 양재역 벽서 사건은 소윤이 꾸민 공작정치로 밝혀지고 유배 갔던 사림들은 다시 등용 되었다. 그러나 미암 유희춘은 그러하지 못했다. 12월에 함경도 종성에서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미암은 은진 유배지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번은 정읍에 사는 유학자 일재 이항(1499∼1576)이 조정의 부름으로 서울로 가면서 미암을 찾았다. 유희춘이 묵묵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재는 “그대는 옛날의 인중(仁仲, 미암의 자)이 아닐세.” 하였다.

1567년 7월에 선조가 즉위하자 세상은 달라졌다. 사림들이 중용되었고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모두 복직되었다. 1567년 10월 선조는 유희춘, 노수신의 복직을 명한다. 55세의 미암은 정5품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20년 만의 복직이었다.

그래도 품계는 예전 그대로였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 나섰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순서를 따르지 않고 발탁하여 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1568년 1월 13일에 선조는 기대승의 건의를 받아 들여 유희춘, 노수신을 특진시키라고 명령했다. 2월 18일에 유희춘은 홍문관 응교(정4품)으로 특진되었다.

1569년 7월에 유희춘은 백인걸·노수신과 함께 당상(堂上)에 올랐다. 그해 11월 6일에 미암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1571년 2월 4일에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전라감사 유희춘이 봉안사(奉安使)로 전주에 온 박순과 함께 전주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獻芹歌)이다. 『여씨 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찐 미나리를 캐어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하였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선조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그를 등용하여 특별 승진시켜준 이가 선조 아니던가.

유희춘은 선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특히 경연에서는 특출하였다. 그의 박학과 암기에 감탄하여 선조는 유희춘의 강독과 해석만을 따랐다. 강독관이 왕왕 이설(異說)을 제기하여도 선조는 유희춘의 의견을 따랐는데, 선조는 "유희춘은 경적(經籍)을 널리 보아 학술이 정밀하고 자상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선조실록 1571년 11월 5일자)

한마디로 유희춘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고, ‘책속의 귀신’이었다. 1)

한번은 유희춘이 『시경』 「석서(碩鼠)」를 강론하였는데, 선조가 물었다.

“쥐는 천하고 나쁜 동물인데 어찌하여 육갑(六甲)의 첫 번째를 차지한 것이오?”

미암은 “쥐의 앞발은 발톱이 네 개이고 뒷발은 발톱이 다섯 개이니, 음양이 상반되기로는 이만한 동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음이 다하고 양이 생기는 뜻을 취하여 자(子)를 12시(時)의 첫 번째로 삼은 것입니다.”라고 답하니, 선조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나온다.

미암은 책도 많이 만들었는데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과 『헌근록(獻芹錄)』이 대표작이다. 『국조유선록』은 김굉필· 정여창 · 조광조· 이언적 등 네 분 명현의 저술과 언행, 행장을 엮은 책이고, 『헌근록』은 역대 선현들이 임금에게 제시한 임금의 길을 편찬한 책이다.

1571년 12월 2일에 유희춘은 경(敬)과 의(義)를 확립하라는 보좌명(黼座銘)을 선조에게 헌상했다. 이는 임금이 좌우에 걸어두고 항상 살펴야 하는 잠언(箴言)이었다.

이 마음을 깨우침, 해가 떠오르는 것 같네 提醒此心, 如日之升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아, 중정하고 화평하리. 窮理修身, 中正和平

한편, 유희춘은 1571년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외조부 최부의 글을 모은 『금남집』을 간행했다.

1) 성균관 유생들은 미암을 당나라 학자 우세남에 견주어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行秘書)’이라 하였고, 유희춘이 묻는 말에 척척 대답하고 의심난 대목을 매우 정밀하게 풀어준다 하여 ‘책 속의 귀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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