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의 끝자락에서 배우는 것들(10)
초혼의 끝자락에서 배우는 것들(10)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8.0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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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팽목항에서 부르짖는 초혼의 함성이나 시인 소월이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라고 외치는 초혼과 다르게, 전통의 상례에서의 초혼은 망자의 임종 후 유족들의 ‘아이고’ 또는 ‘어이어이’하는 통곡이 끝나고 나면 가족들은 망자의 저고리를 잡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는 등 혼백을 부르는 초혼의례를 말한다. 초혼은 상례의 한 대목이다.

모든 생존자에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사람들은 생전에 다정하고 소중한 많은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시간들을 경험한다. 근래에 중국의 민주주의자들은 유사보를 떠나보냈고, 이 지역 운동가들은 박석률 동지를 잃었다. 그가 마지막 남긴 평화, 자주, 개혁이라는 화두만 그의 신산했던 일생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다.

일상들의 경험과는 다르게 떼죽음의 체험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많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떼죽음의 현실이 국사, 세계사 가릴 것 없이 비일비재하다. 제국주의의 횡포, 독재권력들의 권력유지와 권력확장 때문에 죽음의 자기 책임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떼죽음이 역사 속에서는 인종청소, 홀로코스트로 불리는데, 광주 5.18학살은 어느 범주일까?

죽은 자들을 위해서 원수를 찾아 복수할 길도 없고 해원할 방법도 없는데, ‘산자여 따르라’고 목청껏 부르는 우리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우렁차다. 그런데 애잔함 또한 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5.18 발포책임자를 규명하자고 빤한 주장을 구두선처럼 읊조리지만, 규명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는 성 싶다. 전두환 장군이 벌금의 반을 갚았다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오늘의 엄연한 일상이다. ‘그래. 아이야. 진실은 가슴 속에 쌓이는 것이지 광명천지에 그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역사’라고 어른들은 불끈거리는 손자를 다독인다.

아르메니아 학살을 필두로 현대사를 장식하는 혈흔을 넘는 혈해들,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야만을 문명화 시키면서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저질렀던 오만무례헸던 짓들이 오늘의 중동, 아프리카의 운명을 규정짓고 있는 것을 보면, 일찍이 공자가 애제자 안회의 죽음을 아파하면서 외치던 하늘의 길을 회의했던 저간의 사정들이 다가오면서, 아울러 인간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이 결국은 인간의 인간조건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탐진치를 설파했던 석가도, 인의를 체득할 것을 말했던 공자도, 사랑을 하늘의 길로 현실의 이정표를 세우고자 했던 예수도 분명 위대한 선각자로 인간성의 어둠을 밝혀 드러냈지만,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생명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결국은 욕망을 어떻게 윤리화 할 것이냐, 가치화 할 것이냐로 귀착됨을 알게 된다.

껍데기는 가라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던 시인도 인간의 어둔 욕망을 직시해서 몸부림쳐 절규했다. 시인은 그의 화두만 남긴 채 갔지만 껍데기는 여전히 득실대고 쇠붙이는 이 땅의 곳곳에서, 아니 세계의 도처에서, 그 웅장한 철옹성을 쌓았고 오늘도 쌓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성과물은 그 위용도, 아름다움도 상당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행복하게 해준다. 그래서 무작정 욕망만 탓하는 것은 조금은 민망하다. 욕망 그 자체는 도구 같은 것으로 중립적이지 않을까를 가늠해 본다. 욕망이 어떤 주체에 의해서 가동되는가가 문제다.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의 갈림길도 역시 사람에 의해서 나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욕망의 가치화를 말하고 그 세련성을 말하는 성 싶다.

칼레시(市)의 일곱 의인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인간윤리를 기리는 까닭이리라. 그러나 특별한 영혼들의 특별한 결단을 보편타당한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너무 버겁다. 뻔히 죽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선택하는 것은 안중근, 윤봉길, 윤상원에게나 가능하지 모든 사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행복과 영양가를 겨냥한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동물과 진배없다. 동물과 다른 것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는 인간의 대뇌 덕분이고, 대뇌는 인간으로 하여 지적 능력을 갖게 하고 감성과 욕구를 컨트롤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

크로포토킨과 한국에서의 그의 실천적 추종자인 신채호, 이회영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의 방향은 금력과 권력이기 때문에 인간 삶에 있어서 권력과 금력을 공유하는 무정부주의를 제시했다. 세간에 한참 뜨고 있는 박열도 무정부주의자였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어서 한 번도 무정부주의가 권력의 주체가 되어보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막장에서 혜성처럼 빛난다.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주류도 무정부주의자였고 남미 칠레의 아옌데도 무정부주의자였다.

세속을 못 벗어난 우리들은 떼죽음 당한 분들을 위로하고, 그러한 비극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면서 살아남은 우리들의 가능한 길을 다짐해본다. 사람들은 많은 삶들의 귀감은 못되더라도 소극적으로는 나쁜 편이 안 되는 것, 적극적으로는 좋은 사람들과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고 밝게 하는데 일조하는 숙세주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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