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3)-하서 김인후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3)-하서 김인후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8.0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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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유일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선정 가운데 하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태산 북두(泰山 北斗)와 같은 백세의 스승
▲ 7월 29일,‘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세 번째 순서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을 찾아 필암서원(筆巖書院)을 갔다.이번 프로그램에는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오늘은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세 번째 순서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을 찾아 필암서원(筆巖書院)을 가야 하는데, 아침부터 푹푹 찌니 걱정이 앞선다. 더군다나 이번 프로그램에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이 대거 참여한다고 하니 더욱 그랬다.

오전 10시에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과 참여 시민들이 출발하고, 난 따로 장성역으로 향했다. 10시30분에 오늘 하서와 필암서원에 대해 해설을 해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15분가량 늦게 도착했다.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한 11시에 늦지 않았다는 점일 게다. 그렇게 시작한 이날 프로그램엔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을 비롯해 시민 등 50여명이 참여했다. 지난 7월 29일이었다.

우암이 특별히 택한 ‘확연루(廓然樓)’

필암서원 앞에 서니 2층 누각에 걸린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확연루(廓然樓)’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확연루는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의 글씨라고 한다. 확연루라고 누각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확연루기’에 의하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 송시열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확연루를 통과해 들어가니 강당 건물이 나온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적혀 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는 이 편액은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의 글씨란다. 또 이 강당 건물은 옛 진원현(珍原縣)의 객사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강당 마루에 올라서면 마루 위에 걸린 작은 편액 ‘청절당(淸節堂)’이 눈에 띈다.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고, 편액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이 썼다.

청절당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따온 것

김세곤 원장은 이곳에서 먼저 하서 김인후 선생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김 원장의 말에 따르면 하서 김인후 선생은 문묘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호남 유일의 선비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에는 붓처럼 생긴 바위 ‘필암(筆巖)’이 있는데, 풍수지리학에서는 붓 모양의 봉우리(文筆峰)나 바위가 있으면 큰 문장가나 큰 학자가 태어난다고 한다.

계속해서 김 원장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울산김씨가 장성에 뿌리를 두게 된 것은 김인후의 5대조인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 1348~1413) 때의 일로, 태종 임금 때 양주목사 김온이 세자 책봉 문제에 연루되어 1413년(태종13년)에 사사(賜死)되자, 부인 민씨가 3형제(달근․달원․달지)를 데리고 장성 맥동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다. 민씨부인은 태종의 왕후인 원경황후 민비의 친척이었다.

김인후의 고조부는 김달원이고 증조부는 김의강이며, 조부는 금구훈도 김환이었다. 부친은 김령이고 모친은 옥천조씨다.

‘장성신동 천하문장’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아래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8세 때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삼촌인 조원기(1457∽1533)로부터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9세 때 봄에는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기준(1492∽1521)을 만나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붓을 선물받기도 했다.

10세 때는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18세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서 유배 중인 최산두를 찾아가 글을 배웠다. 19세 되던 1528년에는 성균관에서 주관한 백일장에서 칠석부로 장원을 하였다. 당시 시관이었던 대제학 이행(李荇)은 남이 써 준 글이라고 의심하여 김인후에게 7가지 제목을 주면서 테스트를 했는데, 김인후는 그 자리에서 바로 글을 지어 이행의 의심이 풀렸다고 한다.

김인후는 15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3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이 때 4살 아래인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도 가깝게 지냈다고 만암 이황 선생이 귀띔해 준다.

이어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 著作)이 되었다.

인종에 대한 절의 끝까지 저버리지 않아

36세 되던 해 인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큰 기대를 했으나, 같은 해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했다. 이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학문을 닦으면서 평생을 보냈다. 명종 즉위 후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서 일재(一齋) 이항(1499~1576),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송강(松江) 정철, 고암 양자징 등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이 하서와 필암서원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김세곤 원장은 “조선시대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을 꼽을 수 있다”면서 “향교가 지방 국립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지금의 지방 사립학교에 해당한다”고 서원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김 원장은 청절당에 있는 많은 편액 중 특히 하서의 제자였던 송강 정철이 쓴 편액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1546년에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 1일에 난산(卵山)에서 인종을 그리며 종일토록 통곡하였다”면서 “제자인 송강 정철(1536∽1593)이 그 모습을 시로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 청절당에 있는 송강 정철의 시

다음은 청절당에 있는 송강 정철의 시다. 이 시에 나오는 담재옹은 하서의 다른 호다.

東方無出處 동방무출처(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獨有湛齋翁 독유담재옹(홀로 담재옹만 그러하였네)

年年七月日 년년칠월일(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痛哭萬山中 통곡만산중(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인종이 승하하신 7월 1일이면 난산에 엎드려 종일 통곡

그는 또 “백화정 앞 산과 산 사이에 계란 같이 둥그런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 하여 난산(卵山)이다”면서 “난산 입구에는 ‘난산지비’라고 적힌 비가 세워져 있다. ‘장성 김인후 난산비’라고 표시된 안내판에는 ‘하서 선생은 인종이 승하하신 7월 1일이면 이곳 난산에 엎드려 종일 통곡하였다’고 적혀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세곤 원장은 필암서원 좌우에 있는 동재와 서재에 대해 “동재의 이름은 진덕재(進德齎)이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齎)로 오늘날 기숙사에 해당한다”면서 “글씨는 청절당을 쓴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말했다.

▲ 경장각(敬藏閣)은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던 곳이다. 편액 글씨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 임금이 쓴 글씨는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망사로 씌워져 있다.

필암서원 사당 앞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 하나 있다. 경장각(敬藏閣)이다.

경장각(敬藏閣)에 대해 김 원장은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던 곳이다. 묵죽도는 도둑을 맞았으나 다시 찾아 국립 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경장각,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던 곳

편액 글씨에 대해 그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면서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망사로 씌워져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김인후 선생과 양자징 선생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는 우동사(祐東祠)는 문이 잠겨 가보지 못했다. 김 원장은 “우동사라는 명칭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에 ‘하늘이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낳게 했다’고 극찬한 데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우동사 사당에는 중앙에 ‘문정공 하서 김선생(文正公 河西 金先生)’이라는 김인후의 위패가, 동쪽 벽에 ‘고암 양선생’이라는 양자징(1523∽1594)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자징은 1786년 2월 26일에 정조의 허락을 받아 김인후 신위 왼편에 추배되었는데, 그는 소쇄원 주인인 양산보의 아들이자 하서의 둘째 사위로 거창현감, 석성현감 등을 지냈고, 김인후의 행장을 지었다”고 덧붙였다.

▲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쓰일 가축을 매어놓는 비석인 계생비

우동사 앞에는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쓰일 가축을 매어놓는 비석인 계생비가 있다. 서원의 묘정비(廟庭碑)로서 제물로 쓸 가축을 메어놓고 초헌관 등 제관이 충돌례(充돌禮)를 행하는 비이다.

김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가축이 건강한지, 병에 걸렸는지 등을 검사하기 위해 가축을 메워뒀다고 한다. 비문은 연재 송병선이 지었고, 앞면의 글씨는 봉사 송일중, 뒷면의 글씨는 해관 윤용구, 전서는 동강 김영한 등이 각각 썼다.

이제 일행들은 필암서원을 나와서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유물전시관은 2008년에 개관하였는데 하서의 유물 29종, 3,798점이 전시되어 있다. 붓, 상아홀, 벼루, 책장, 압판, 책판, 현판 등의 유물과 노비보, 초서천자문, 백련초해, 집강안, 봉심록 등을 볼 수 있었다.

김 원장은 “전시관의 이름은 원진관(元眞館)인데 원진은 공자와 주자를 잇는 하서의 위업을 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 유물전시관은 2008년에 개관하였는데 하서의 유물 29종, 3,798점이 전시되어 있다. 붓, 상아홀, 벼루, 책장, 압판, 책판, 현판 등의 유물과 노비보, 초서천자문, 백련초해, 집강안, 봉심록 등을 볼 수 있었다.

이후 일정으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있는 김인후 묘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에게 차마 묘소까지 동행하자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만암 이황 선생을 비롯해 일부만 가기로 했다.

하서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

난산에서 맥동마을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가니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나온다. 신도비 안내문에는 “이 신도비는 1742년에 세운 것으로 비의 글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82년에 지은 명문장이다. 본문은 중추부사 이재가 쓰고, 전서는 대사헌 김진상이 써서 원당산 묘소 아래에 세웠다.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 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쓰여 있다. 2003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 신도비는 1742년에 세운 것으로 비의 글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82년에 지은 명문장이다. 본문은 중추부사 이재가 쓰고, 전서는 대사헌 김진상이 써서 원당산 묘소 아래에 세웠다.

원 신도비문은 훼손이 심해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옆에 새로 세운 신도비가 있어 원문을 읽어볼 수 있었다.

신도비에서 2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하서 김인후의 묘소가 나왔다. 이황 선생의 말에 따르면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안은 형상이란다.

▲ 신도비에서 2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하서 김인후의 묘소가 나왔다. 이황 선생의 말에 따르면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안은 형상이란다.

하서 김인후의 묘는 앞부분에 있고, 뒤에는 하서 선생의 부모 묘가 있었다. 하서 김인후 묘 앞에는 망주석이 좌우에 두 개 있고, 그 다음에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에는 “문정공 하서 김선생지묘, 증 정경부인 여흥윤씨부좌”라고 적혀 있다.

모든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김세곤 원장은 “하서 선생은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인연을 중시했다”면서 “인종과의 의리를 지키며 의롭게 살고자 한 면은 하서의 돋보이는 대목이다”고 강조했다.

더위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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