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전사 고 박석률 선생 영전에
통일애국전사 고 박석률 선생 영전에
  • 이상걸 시민의소리 이사
  • 승인 2017.07.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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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밤하늘을 촛불로 수놓았던 지난 겨울 동지섣달 삭풍은 유난이도 살을 에었더이다.

마침내 촛불의 염원이 담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봄을 맞은 남녘땅은 오랜 가뭄에 논도 밭도 다 갈라졌더이다.

이제 장맛비에 가뭄도 해갈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모두들 멍하니 선생이 거주하셨던 북녘만 바라볼 뿐이었더이다.

선생이시어, 어찌 이리 황망히 가실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 겨울 칼바람 추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 밝히시더니 이제 민주정부 수립되어 적폐청산 가시밭길 나서는데, 길잡이 해주지 않으시고 무에 그리 급히 떠나시오이까?

늦둥이 고운 따님, 아빠를 닮아 공부를 잘하나보다는 주위의 말에 말없이 대견해 하시더니 이제 남은 공부 누가 시키고 결혼은 누가 시키라고, 가시는 길 차마 눈에 밟히셨을 터인데 어찌 그리 서둘러 가시나이까?

통일애국전사 박석률 선생이시어! 지난 겨울 초입, 광화문에서 우연히 뵀을 때가 생각납니다. 평소보다 노곤하고 기력이 쇠한 형색이신데도 “광화문에는 나와야지”라시며 엷은 미소로 지인들을 격려하시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선생은 묵직한 책과 자료 보퉁이 가방을 메셨고, 손에는 옷가지, 세면도구에 두루마리 화장지까지 구겨 넣어진 종이가방을 들고 계셨더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의 미안함이 가슴에 남아 있음을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나이다. 그날 나는 대학 동아리 일행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모임이 성원이 되자 저녁식사장소로 막 옮기려던 차였지요. 당연히 선생께도 우리 일행을 소개해 드리고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일행들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선생과 작별인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녁식사에 소주라도 한잔 올려 드렸어야 했는데, 그날의 대면이 이승의 마지막이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선생님과의 인연을 돌이켜보니, 일찍이 선배들로부터 선생의 존재와 활약상은 전설처럼 전해들었었지만, 직접 뵀던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겨울 무렵 장기수 석방조치로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신 후, 한참이 지난 99년 봄쯤, 어느 사무실에서 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얼굴에 형형하지만 우수에 찬 눈빛, 사람 좋아 보이는 잔잔한 미소가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선생은 장기 복역기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각종 사회구조적 현안에 몰두하셨고, 누구를 만나도 대학 초년생같은 호기심어린 질문을 이어갔었지요. 저에게도 80년대 대학 학생운동, 그리고 청년운동에 애정어린 관심과 질문을 많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회운동의 대선배이시고 감히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열혈 전사이셨지만, 항상 따뜻한 배려에 늘 마음이 편안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허물없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꽤 당돌한 질문을 퍼붓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식사를 하던 날이었던가, 저는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민전’은 왜 만드시게 되었나요? 말 그대로 남한민족해방전선이고, 전위조직을 추구하셨는데, 당시 한국 민중운동의 역량과 성숙도로 볼 때 좌익소아병적 모험주의 아니었나요? 그렇게 해서 무슨 성과가 있었나요? 조건이 무르익기도 전에 우리 측 역량의 괴멸적 타격을 초래한 크나큰 실책은 아니었던가요?” 등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언제나처럼 입가의 엷은 미소를 잃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쎄, 당시 우리는 하루하루 열심히 싸웠어, 조직보위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고, 우리가 하는 행동의 의미가 전체적으로 뭔지는 잘 몰랐어, 하지만 열성으로 주어진 임무를 다했을 뿐이야, 다만 ‘남민전’은 남한 민중의 가열찬 움직임과 건재함을 내외에 알리고 싶었던 거야, 우리가 자주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지”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선생은 장기 복역을 해서인지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늘 질문이 많으셨지만, 토론하다보면 언제나 명쾌한 논리로 본질을 꿰뚫어 보셨고, 촌철살인의 비범함이 느껴졌다. 특히 우리 주변 모임에서 특강을 즐겨 하셨는데, 일반회원들로부터 굉장히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선생은 청년운동단체에 애정이 많으셨고, 당시 전청련, 새날청년회, 북청·남청·서민련 등 지역시민대중조직의 초청강의에 열심히 다니셨다. 강의 후의 친교시간에는 전설적인 투사라는 소개에 어울리지 않게 잘생긴 외모에 반해서인지, 강의 내용의 명쾌함 때문인지 회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곤 하셨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통일애국전사이셨던 선생이 이승을 떠나셨다니 생각할수록 애통하고 절통함에 목이 메어온다.

지난 대선시기에도 전화를 주시며 격려해 주시고, 또 지역운동권 인사들의 나태함과 비루함을 준열하게 꾸짖던 기억이 생생하나이다. 학창시절엔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셨고, 학생운동 전선운동시절에는 지도자이셨던 선생이 민주정부하 대명천지에 다시 나오셨지만, 남들 다가는 미관말직하나 얻어 차지 못하시고 고단한 생활고에다,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해마다 여름이면 기력이 쇠잔하여 고생하시던 모습이 선하여 도저히 그냥 보내드리기 힘드옵니다.

때로는 고집 세고 고루한 숙제를 늘 가슴에 품고 사시는 모습에 주제넘게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선생께 조금만 귀를 기우리면 우리 모두의 나태함과 곤궁함을 꾸짖는 그 추상같은 절의와 날카로운 논리에 금새 고개가 숙여지곤 했지요. 마치 중국 춘추시절 맹자 선생이 양혜왕을 꾸짖는 듯한 그 기개와 절개를 어디서 다시 뵈온단 말입니까?

석률이 형이시어, 선생을 좋아하는 전국 방방곡곡의 숱한 친구, 후배, 지인들 남겨두시고 어찌 혼자 먼저 가시옵니까?

지금 이 시간 서울에서 선생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을 시간인데, 애국열사 박석률 선생이시어, 아니 민중의 벗 박석률 동지시여, 아니 언제나 정겨운 석률 형이시어, 이제 당신을 고이 보내드리지 않을 수 없나이다.

살아서 통일애국전사이셨던 선생이시여, 이제 죽어서 한반도 통일과 민족화해의 조정자로 꼭 다시 부활하소서!

이승의 고단했던 삶 내려놓으시고, 부디 영면하소서!!

고 박석률 형의 후배 이상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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