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7.2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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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북쪽 가족 품에 안겨 평온하게 눈감을 수 있길”
송환촉구서한 보내기, 이산가족상봉 신청, 온오프라인 송환청원운동 등 전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줄망정 하물며 산 사람 소원이야’라는 옛말이 있다.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이 구순이 되어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자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올핸 꼭 그 소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기자의 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25일 오전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화해와 인도·인권적 차원에서 서 선생을 북한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의소리=박용구 기자] 광주지역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90) 선생의 북송을 추진하는 위원회가 꾸려졌다. 광주지역에서 출소해 오랜 기간 이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장기 구금 양심수인 서옥렬 선생의 조속한 북송을 촉구하고, 추진하기 위해서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25일 오전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화해와 인도·인권적 차원에서 서 선생을 북한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인사말, 경과보고, 서옥렬 선생 소개 및 영상상영, 기자회견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추진위원회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먼저 “서옥렬 선생은 30대에 장벽이 가로 막힌 남북을 오고간 혐의로 넬슨 만델라보다 긴 3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면서 “고문과 협박 강요로 한쪽 눈이 멀고 성치 않은 몸과 전향서 강요로 인한 정신적인 고충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어 “감옥에서 나와 가장 소박하게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며 살아왔던 노년은 탈장에 심장질환, 관절에서 발까지 온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으로 91살의 2017년을 살고 있다”면서 “이생을 마감하는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며 살고 있는 서옥렬 선생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조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또한 “촛불 민심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에게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장벽도 잠시 걷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지키려 노력하는 국가의 통 큰 아량을 기대한다”면서 “서옥렬 선생의 한 많은 인생,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부디 북쪽 가족 품에 안겨 마지막 가는 길 평온하게 눈감을 수 있게 가장 인간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처절한 삶을 산 구순의 노인과 60이 훌쩍 넘었을 아들 둘, 살아있을지 어쩔지 알 수 없는 부인의 상봉이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뜻있는 광주시민들이 오늘 이 자리에 뜻과 마음을 함께 모았다”면서 “광주의 작은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민족의 숙원인 평화와 통일의 물꼬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추진위원회는 광주지역 주요 기관장(시장, 시의회 의장, 시교육감), 국회의원(8명), 구청장(5명) 등 16명과 시민·사회·여성·종교·노동계 대표자 75명 등 총 91명을 공동대표로 선임할 예정이다.

향후 활동으로는 청와대, 통일부에 송환촉구서한 보내기, 이산가족상봉 신청, 온오프라인 송환청원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벌이며 여론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서옥렬 선생은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아버지 서계술 씨와 어머니 이경심 씨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손으로 소학교 4학년 때에 서울로 이주하여 미동초등학교, 경기상고를 마치고 고려대 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6·25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편입된 뒤 월북했다. 1953년 인민군에서 전역한 뒤, 1958년 12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 뒤 교원이 되었고, 같은 교원이었던 강순성 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들(태길, 태현)을 두었다.

1961년 8월 9일 서 선생은 고향집을 방문하여 남한정보를 얻고 동생들을 포섭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5살, 3살 어린 두자식과 부인을 뒤로하고 남파되었다. 김하기의 소설 완전한 만남 ‘해미’편이 선생의 당시 이야기다.

한 달 가량 짧은 가족과의 해후를 마치고 월북하던 중 안내원의 실수 때문인지, 운명 때문이었는지 붙잡힌 선생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지만, 자식을 살리려는 부모님과 가족의 노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뒤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공직과 교직에 있던 동생들은 연좌제에 걸려 모두 쫓겨났고, 몇몇 가족들은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민주질서에 어긋나지 않게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29년 만인 1990년, 30대 초반의 청년은 환갑이 넘은 노인이 되어 출옥했다.

예전 의문사위의 조사로 밝혀진 유신시대의 깡패를 동원한 야만적인 전향공작에 의해 반강제로 작성한 준법서약서는 선생의 희망을 다시 한 번 꺾었다. 1992년 이인모 선생의 송환 이후 2000년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송환되었으나, 선생은 직계가족이 모두 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향 장기수’라는 딱지에 의해 송환이 좌절되었다.

그 뒤 노무현 정권 때 '강압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는 국가기관의 판단에 따라 28명의 장기수들과 함께 송환을 요구했으나 결국 이도 무산되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최근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한편, 추진위원회에는 6·15시대 길동무 '새날', 광주기독교교회협회 인권위원회, 광주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광주전남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범민련광주전남연합, (사)우리민족, 서옥렬선생 후원모임, 전대기련 동우회, 광주진보연대,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전남추모연대, 민주노총광주본부, 광주전남민주동우회(준), 오월어머니집,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민중연합당 광주시당, 정의당 광주시당, 통일의병 광주전라본부,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시민주권행동 등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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