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진 말들
흐트러진 말들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7.2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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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옛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우리가 항용 쓰는 말이란 것도 변하기 마련이다. 변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마다 말을 다르게 사용하는 일도 흔하다. 뿐인가. 세대 간에도 말이 안 통할 정도로 다르게 쓰는 일도 적잖다.

남미 아마존 숲에 사는 어느 부족은 모든 일상어를 ‘이’ ‘히’를 교집합하고 장단, 고저를 이용해서 말한다고 한다. 그 부족은 무슨 말이든 이와 히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한다니 인간의 말이란 것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참 모를 속이다.

하기는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해도 제가 다하고픈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이란 것이 심중을 밝히는 경로에 이르면 서로 소통장애를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아닌 말로 버선짝 뒤집어 보이듯 말로 제 속을 다 표현해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그래서 오해도 사고 미움도 산다. 특히 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의 염장 지를 말을 들을 때면 속이 상한다. 말이란 쉽게 배워도 말을 제대로 쓰기는 참 어렵다. 그 말에 진실이 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정직하고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통을 넘어서 신뢰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말이란 인간에게 최선의 소통 수단이 아니라 차선의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얼마 전에 영어 이야기를 했지만 인터넷, 휴대폰의 등장과 함께 줄임말이 너무나 많이 생겨나서다. 나는 이런 것이 당혹스럽고 마뜩찮다. 스마트폰, TV, SNS 같은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난무하는 줄임말의 뜻을 몰라서 헤매기 일쑤다.

‘불금’ ‘프듀’ ‘문모닝’ ‘즐감’ ‘품절녀’ ‘헐’ ‘문상’ ‘뻐정’ ‘냉무’ ‘감택녀’ ‘안습’ ‘껌놀’ ‘3포세대’ 열거하자면 신문 지면을 다 채워도 모자랄 것이다. 이제 줄임말사전이 따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줄임말을 모르거니와 알고 있는 것이 있더라도 사용하진 않는다.

은어처럼 사용되는 말을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별 관심도 없다. 말의 품격이 훼손된다고 믿어서다. 말의 품격은 곧 인품이라고 생각해서다. 문제는 이런 언어파괴적인 줄임말, 은어가 언론매체에 유통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언어 사용에 대해 누가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공통어의 구실을 벗어나는 표현은 대부분 포말 같은 것이어서 금방 물방울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크게 탓할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심각하여 소통 장애, 세대 분리, 통합 갈등을 유발하는 간접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생각이 짦아서인지 나는 기괴한 줄임말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나는 감정적으로 멀리 둔다. 언어란 것이 태생부터가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언어생활이 혼탁해지면 사회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을 안겨준다.

그렇지 않아도 언어의 특성상 발화자의 의도를 완전 헤아릴 수가 없는 한계가 있는데 거기다가 시시때때로 비속어에 가까운 은어나 줄임말을 섞어 쓰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옛말을 상기할 것도 없이 오늘의 우리말은 외래어, 줄임말들이 남용되고 있어 서로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작지 않다.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래 전 ‘노찾사’라는 줄임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일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줄임말이었는데, 그때 줄임말에 잠시 혹한 적이 있다.

한데 작금에 유통되고 있는 줄임말-은어는 아예 공통어에 반기를 들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비틀어 표현한 말들이 많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은 언어생활의 정곡을 찌른 말이다. 기괴한 줄임말을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세대에서 쓰는 것까지는 눈감아준다고 해도 그런 언어파괴적인 말들을 언론 매체에서 옮겨 쓰는 것은 볼썽사납다.

흔히 어떤 현상이 벌어지면 곧잘 ‘사회’쪽으로 책임을 돌린다. 그것은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반성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진배없다. 대체 사회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자신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는 지금 우리 언어생활이 위기에 처했다고 비상벨을 누르고 싶은 마음이다. 바른 언어생활이 선행되어야 국가사회가 정의롭고 투명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반말을 했다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무분별한 줄임말에는 무신경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말에도 혼령이 있다고 이 난에서 쓴 적이 있다. 신뢰, 사랑, 존경의 빛이 나는 말들을 쓰는 세상이 대동세상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새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에 마침 시인 출신이 기용되었으니 차제에 흐트러진 우리의 언어생활을 다잡을 방안을 강구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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