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 시 「초혼」 감상을 감상하다(9)
소월의 시 「초혼」 감상을 감상하다(9)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7.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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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세월호 참사를 방조한 박근혜를 옥에 가두고서야 미흡한대로 설원한 것 같아 우리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팽목항에 메아리 쳤던 초혼의 절규들에 하늘이 감응해서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그래서 악의 축이 결단났다는 비약이 억지스럽지 않다. 그런데 1923년 동경대지진의 와중에서 학살당한 조선사람들의 겹 불행들은 그냥 역사 속에 잠기고 말았다. 6000명이 넘는 조선사람들이 학살되었는데도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은 두 사람만 죽었다고 발뺌하고 있었다. 필자는 세월호 참사가 빌미가 되어 우리의 근현대사에 숱한 생령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감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해원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팽목항을 메운 유족들의 외침도 초혼의 부르짖음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애도임을 절감하게 되어 소월의 시 「초혼」이 예사롭지 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내가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얼마나 절절한 외침인가. 팽목항에 울려 퍼진 외침이. 유가족들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을 전율처럼 체감한다.

많은 학자, 문인들이 소월의 시 「초혼」을 감상하고 비평하였다. 고 김열규 교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서러움이 가장 서럽게 살아있기로는 초혼이 으뜸이다.”, “그의 정한은 때때로 참담한 통한의 막장에서 울림한다. 시름겨운 한숨, 혼잣말의 애소, 소리 없이 두 뺨에 얼룩지는 눈물 그리고는 어둔 방 속의 흐느낌 등은 서로 어울려서 그의 시의 기본적인 조율을 이룬다”고 평했다. 또 김흥규 교수는 “어떤 다른 사정에 따른 이별은 언젠가 만날 때를 기대할 수 있지만, 죽음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절대적 장벽이기 때문”이라고 해설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한다. 유종호는 “낭만적인 사랑이나 그 통속적 변형인 연애가 수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낭만주의시기에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를 터놓고 연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시인의 젊음과 함께 낭만적 사랑에의 믿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낭만적 상상은 성질상 현재로부터의 도피를 꾀하고 이에 따라 과거숭배, 미래신앙 혹은 죽음예찬으로 빠지기도 하는데 「초혼」에는 죽음예찬의 흔적조차 보이기도 한다”고 평한다. 훗날 소월의 자살을 의식한 평이 아닐까? 김시태는 「자연과 덧없음의 인식」에서 소월의 「초혼」을 덧없는 삶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좋게 말하면 정신의 원숙을 의미하는 체념과 달관의 세계, 나쁘게 말하면 자기방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였다.

앞서의 비평과 감상과는 다르게 고 고영자 교수의 「초혼」 비평이 눈길을 끈다. 고 교수는 일본문학 전공자로 필자의 학교 동료였다. 고 교수는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소월의 「님」을 대체로 남녀 간의 연인이라 하여 여성적인 편향으로 논의하는 것은 사전적 비판방법의 오류”로 평가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주석적 비평을 주장한다. 고 교수는 소월의 시 「초혼」을 초혼의식에 중심을 두고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혼은 민속으로서는 임종이나 사람이 죽은 직후에 베갯머리나 지붕 위나 높은 곳에 올라가 사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혼백을 불러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거나 사망자를 돌려보내는 풍습이다. 사망자의 혼백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확인, 장례를 치른다. 고 교수는 「초혼」을 나라 잃은 국민의 곡성으로 설명한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 동포들을 향한 초혼이라 설명한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했다. 소월의 연보에 의하면 1923년 3월에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5월에 동경에 가서 동경상대 예과에 입학하였다가 지진이 일어난 후 10월에 귀국하였다. 관동대지진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 「초혼」은 1925년 12월에 간행된 〈진달래꽃〉에 수록되어 있고, 1923년 5월 이전에 창작한 시 목록 안에는 「초혼」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초혼」의 의미가 죽은 자의 혼령을 부르고 있다는 점으로 보면 「초혼」은 관동대지진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집단학살이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로 특정화, 개별화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을 작가가 수용하는 시각과 관점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시인이, 조선의 젊은이가 관동대지진의 참상에 어떤 감회도 없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닐까? 참상에 대한 적극적 표현이 없는 것은 어느 평자의 말대로 검열을 의식한 자기검열의 결과로 보면 그 감상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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