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로 본 그때 그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사’로 본 그때 그 택시운전사
  • 류승희 시민기자
  • 승인 2017.07.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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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생계수단에서 목숨 건 무기로 변신

“내 눈으로 진실을 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한국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한 고 위르겐힌츠페터 기자의 소감이다. 1980년 5·18민중항쟁때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시민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아 항쟁기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힌츠 페터기자의 이 짤막한 소감문에 착안한 감독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만들었다.

먹고 살기위한 개인사에 출발했다가 시대사로 확장시킨 셋 택시운전사이야기다.

#. 영화 ‘택시운전사’

열한 살 딸을 홀로 키우는 소시민 만섭(송강호)은 1980년 5월18일 BBC에서 광주 계엄령 사태를 접하고 한국에 들어온 독일의 일본 특파원 힌츠 페터를 광주까지 태우고 간다. ‘광주사태’에 무지했던 한 평범한 가장은 항쟁의 비극을 현장에서 목도하면서 사회의식이 각성한다. 이제 그는 택시를 몰고 광주시민들과 함께 하려한다.

#. 1980년 5월 광주.

터미널 로터리부근에서 머리가 깨어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운송하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우선 병원으로 운반해야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는 택시운전사에게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마구 내려쳤다.(…)

무등경기장에 모인 택시는 2백대가 넘었다. 운전기사들은 차를 질서정연하게 모아놓고 지금까지 목격한 잔악상과 동료 기사들의 부상 사실을 알리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면서 ‘군 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했다. 택시는 그들 가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 택시를 무기로 삼아 목숨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1987년 6월.

광주개인택시 민주기사협의회’의 주축회원이 5·18 광주민중항쟁에 열렬히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때 희생된 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었고 그 결과로 결성된 것이다.

6월항쟁때 우리들도 전경들의 이동파악, 돌과 각목, 화염병 운반, 유인물 배포 등 새벽까지 시위대와 함께 했다. 여학생과 부녀자 수송, 시위대 식사제공, 연행학생 구출 등…. 이 과정에서 많은 운전기사들이 최루탄 부상으로 입원치료를 받았다. 국민신문 (1988년 4월29일. ‘광주개인택시 민주기사협의회’인터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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