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서태지! 껍데기 대중문화!
웃기는 서태지! 껍데기 대중문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주 사회문화평론가
웃기는 서태지
   
▲ 대중문화 자체가 일본과 미국의 대중문화를 맹목적으로 흉내냄에서 출발하였기에, 우리 자신의 삶을 담아냄에 미숙하기 그지 없다
서태지가, 이번에 '컴백 홈'이라는 노래를, 음치가수 이재수?가 '컴배콤'이라는 이름으로 패러디해서 불렀다고,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고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지, 아주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중앙일보 8/1일짜에 실렸다고 한다. )

서태지는 작년 가을에 껍데기 락음악으로 가지고 오면서, 온 나라를 씨끌벅적하게 하더니, 결국 별 볼 일 없어졌다.

그 별 볼 일 없는 반응에 신경질이 나 있었는지, 이번에는 어떤 가수의 패러디에 '너무도 웃기는 과민반응'을 하였다.

자기가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경직성 그리고 그 폭압성에 분노하여,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청소년의 영웅이 되었음에도, 그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자기 곡을 패러디했다고 자기가 비난하였던 기성세대의 폭압을 그대로 닮은 짓을 하였다고 본다.

자기의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듯이, 패러디도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 수단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패러디 표현방식을 인정한지 10여년이 넘었는데도, 그는 이제 통념화된 이런 표현방식에 지나친 거부반응을 보이는 건 '여러 가지'점에서 '큰 잘못'이다.

*****

실은 서태지만 그러는 게 아니다.

[룰라의 포르노 영화 이야기]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땅의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음습한 지배'를 위한 희생양이요 음흉한 도구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 매스컴 프로듀서 연예인 매니저 ``` )이 이 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나라 대중문화라는 게, 그렇고 그런 뻔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우리 나라 대중문화의 얼굴마담인 연예인들은 그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여기에서도 여실하게 알 수 있다.

또 하나 화나는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이 '기득권 세력의 음습한 지배'를 폭로하고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리더들은 그 껍데기만 흉내내고, 학자들은 '아무도 모를 암호'을 말장난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대중 문화를 깨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그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이제 그 알맹이를 이야기해야 한다!

*****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설쳐대니, 강진의 '장사익 모독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장사익 모독사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대중문화의 껍데기를 이야기하고, 그 음습한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는 맨나 '이 모냥 이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이런 뜻에서 다음 글을 싣는다. 다음 글은 작년 가을에 서태지가 컴백할 때, 서태지를 비판한 글이다. 그는 그 때도 웃기더니, 이번에도 웃겼다.

**************

<‘코 묻은 돈’에 빠진 서태지 >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다. 대중문화를 다양하게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현상에 관심으로, ‘락 음악과 인권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와 녹음 테이프를 자료 삼아 강의도 한다.( 락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 그리고 문학 미술 만화 영화 연극 체육 등에 관련된 사회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연결 지어 이야기한다. )

*****

강의 비디오 맨 처음에 “락 음악은 혁명이다!”라는 구호가 나온다. 이건 락 음악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월남전 반대 운동에 연결된 ‘民權운동’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한 말이다. 민권운동은 기득권 세력을 향한 저항이요 도전이다.

얼핏 혁명이라는 낱말이 지나쳐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정권교체나 세력교체를 넘어서서, 인종차별 반대 ` 성차별 반대 ` 전쟁과 핵무기 반대 ` 환경보호 ` 프리 섹스 ` 새로운 종교운동 ` 자연 공동체 생활운동 ```에 이르는 생활양식을 온통 바꾸어 보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에,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민권운동을 향한 음악에는 락 음악 말고도 포크 음악 ` 째즈 음악 ```이 있고, 그 표현양식에 따라 수많은 갈래가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끌어들였다는 힙합이나 레게 음악도 이런 수많은 갈래 중에서 흑인음악 갈래를 타고 나온 신세대 음악이다.

이런 음악들을 ‘언더 그라운드’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이 기득권 세력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고 상업주의에 물든 매스컴 활동을 거부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밑바닥에서 빡빡 긴다”는 것을, 그들은 무명의 설움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본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당연한 터전으로 여긴다.( 노찾사 =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그룹 싸운드 들국화가 TV나 라디오에 보이지 않고, 라이브 무대를 주로 함도 그 뜻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


서태지에게는 이게 없다. 인권을 위한 사회운동도 없고, 밑바닥을 빡빡 기는 언더 그라운드의 치열한 실험정신도 없다. 그래서 그는 ‘사이비’이다. 그에게는 그저 손재주로 달군 ‘미국 흉내’만 있고, 맹목적인 젊음의 발광에 영합하는 ‘돈독’만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문화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문화 독재자’로 보이고, 좀더 리얼하게 말하면 광신도들의 ‘사이비 교주’와 닮아 보이는 것이다.

( 매스컴이나 안티 서태지 모임에서 하는 서태지 비판은, 앞 이야기 없이 어려운 말 써 감서 뒷 이야기만 해 댄다. 그러니 서태지 비판이, 일반 사람에게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즈그들끼리 치고 받는 즈그들 잘난 체”로 보이고, 서태지 팬들에게는 “누구 잘 되는 꼴을 못 보고 씹는 버릇”으로 콧방귀 뀌게 한다. )

그런데 이게 서태지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나라 대중문화 자체가 일본과 미국의 대중문화를 맹목적으로 흉내냄에서 출발하였기에, 우리 자신의 삶을 담아냄에 미숙하기 그지 없다. 그러니 서태지만 탓할 일이 아니다.( 실은 대중문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고급문화의 맹목적인 흉내는 훨씬 심하다. 도올 김용옥씨와 강준만씨가 이를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


이제는 우리 문화가 우리의 생생한 삶을 담아야 한다. 그 형식이 영화든 만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글이든, 고급이든 저급이든, 전통이든 외래이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이제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가는 삶을 담아야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그가 입시지옥에 얽매인 삶을 ‘난 알아요’와 ‘교실 이데아’에서 담았기에, 그 노래 스타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보았다.( 물론 그 때도 매스컴의 호들갑과 팬의 맹목적 열광을 사회병리 현상으로 보기는 하였다. ) 이번에 서태지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는 구석구석에 짙은 그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참다운 저항 음악을 하려면, 이 땅에서 그 짙은 그늘과 함께 숨쉬면서, 그 위력적인 카리스마로 이 땅의 어둠을 분노하고 소리쳐 불러야 한다. 그에게는 님(사회운동)도 보고 뽕(돈)도 따는 길이 있다. 은퇴와 컴백 ` 미국에 은둔 ` 매스컴 장난질 ``` 같은 그런 잔재주를 피우지 않아도 될 만큼, 그는 컸다. 그는 이제 얼마든지 참으로 신바람 나는 일을 할 수 있게 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잔재주로 베래 부렀다. 경솔하게 말하겠다. 그를 ‘두고 볼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는 매스컴과 코흘리개의 한 시절 신나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우물에 빠진 돼지’라더니, 코 묻은 ‘돈물에 빠진 태지’가 된 것이다. 그것은 서태지의 한계라기 보다는 우리 나라 자체의 한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