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4)
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7.0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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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중종, 낙향 중인 송흠에게 우참찬을 제수하다

송흠은 1538년(중종 33)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80세가 넘은 이가 벼슬한 사례가 없다며 물러나기를 청하여 중종이 윤허하였다. 그는 고향 영광으로 내려와 관수정을 짓고 노후를 보냈다. 1)

1540년 12월21일에 중종은 은퇴한 송흠에게 의정부 우참찬을 제수했다. 2) 이어서 1541년 1월1일에 송흠은 전라감사를 통해 중종의 유지를 받들었는데 그것은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어명이었다. 송흠은 거역하지 못하고 2월11일에 중종을 알현하고 사은숙배한 다음 곧바로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중종은 경회루에서 술을 하사하고 의정부에서 일하라고 했다. 송흠은 2월14일부터 의정부에 출근했지만, 병이 나서 타락죽만 먹고 겨우 체력을 유지했다.

3월16일에 이르러 송흠은 부축을 받으며 입궐했다. 그는 연일 한 숟갈의 밥도 먹지 못했고 기운이 떨어져 감히 아뢰지도 못하고 미리 써두었던 사직의 글을 승지에게 주어 전달하게 하였다.

한참 후에 중종이 편전에 좌정하였다하매 송흠은 승지의 부축을 받아 임금 앞에 가니 허가한다는 유지의 말씀이 있었다. 송흠은 갑자기 “소신은 귀가 어두워 자세히 듣지를 못합니다.”라고 두 번이나 아뢰었고, 송흠은 사관이 기록한 초본을 본 뒤에야 그 대략을 알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근래에 탐학한 풍습이 날로 더 하고 염치의 도가 없어지매 경을 본직에 제수하여 의표를 삼으려 하였으나 지금 경의 심정을 피력한 글을 펴 보니 간절하기에 그대의 뜻을 따르겠다.” 3)

4월11일에야 송흠은 서울을 떠난다. 그는 전별연을 환대받고 4월22일에 영광에 돌아왔다. 4)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1543년 7월21일에 중종은 송흠을 판중추부사로 제수하였다. 당시에는 송인수(1487∼1547)가 1543년 2월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어명을 받들어 관수정 건너편에 정자를 지어 ‘기영정(耆英亭)’이라 이름 붙였다. 5)

▲ 기영정

9월에 송인수는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송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6)

이 때 송인수는 기영정 시를 지었고, 송흠도 화답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기영정 마루에 붙어 있다. 

▲ 기영정 시

그러면 송인수가 지은 기영정 원운(元韻)을 감상하여 보자.

제1수

호해(湖海 호남 바다)의 영검은 우리의 영공이 있게 하였고

일생을 빙벽(氷壁)같이 살아 청고함 닦았다네.

주상의 성은이 겹침에 포상이 연달았고

부모를 모시고자 하는 효심이 깊어서

여러 번 외직을 청하였네.

제2수

서가에는 2∼3천권의 책만 가득 꽂혀있고

연세는 높아서 86세 춘추라네.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를 벌였으니

단청에 옮기어 살면서 만년을 머무르리.

한편, 1544년 3월22일 중종실록에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 가서 송흠을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신(史臣)의 평이 일품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 송흠은 90세가 가까운데도 기력이 오히려 정정하였다. 특별히 조정에서 숭품(崇品)을 총애하는 은전을 입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인자한 덕의 효과라고 했었다. 도내(道內)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1) 중종실록 1538년 9월9일

2) 중종실록 1540년12월21일

3) 중종실록 1541년 3월16일

4) 송흠은 우참찬 제수와 관련하여 서울에 갔다 온 전말을 ‘기행록’으로 남겼다. (『지지당 유고』 참조)

5) 기(耆)라 함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年高德厚)’는 뜻인데, 70세가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 한다. 영(英)은 풀이나 식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을 말한다.

6) 송흠은 ‘기영정 연시기(宴時記)’를 남겼다. 그는 ‘잔치에서 갖가지 풍악을 연주하였는데, 정업곡(定業曲)을 먼저 하고 처용무, 관음찬, 공 던지는 기예, 노 젓는 노래 등으로 무릇 귀와 눈을 즐겁게 하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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