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4) 술지(述志)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4) 술지(述志)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7.06.21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밭으로 평상을 옮겨 편하게 누워 책을 보네

일정한 나이가 들면 미련 없이 벼슬을 내놓고 초야에 묻혀 지냈던 상당한 선현들의 의연한 모습을 만난다. 스쳐 지난 한 조각의 꿈이려니 생각하며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연을 음영했고 인생을 노래하며 여생을 즐겁게 보냈던 글도 접한다. 이를 안빈낙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여 대부분 그랬지만 정적(靜的) 동양인 경우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보며 지금의 한가로운 이 생활을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述志(술지) / 야은 길재

개울 옆 띠풀 집에 한가롭게 살고 있고

밝은 달에 맑은 바람 흥취마저 넘치는데

산새와 벗 삼으면서 편히 누워 책보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임계모옥독한거       월백풍청흥유여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외객부래산조어       이상죽오와간서

 

대밭으로 평상을 옮겨 편하게 누워 책을 보네(述志)로 번역해 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개울 옆의 띠풀 집에서 한가하게 혼자 있는데 /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흥취 더욱 넘치는구나 // 하루 종일 찾아오는 손님이 없이 산새와 벗을 하면서 // 대밭으로 평상을 옮겨 편하게 누워 책을 본다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한가롭게 뜻을 기술함]로 번역된다. 고려의 삼은 절신을 찬양하는 시조 한 수가 보인다. [온갖 영화 담았다가 벽장 속 감춰주고 / 거센 바람 새 왕조야 어서 가라 물리치니 / 삼은의 곧은 절개가 절신(絶臣)되어 가르친다]고 했다.

깊은 절의를 생각할 때에는 위 [술지(述志)]도 좋겠지만 한 단계 나아가 세상일에 초탈했던 풍모를 생각할 때에는 [한거(閑居)] 쯤이 더 어울리겠다.

시골의 조용한 개울가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지만, 불어오는 바람과 환한 달빛이 비추어주니 삶에 흥취가 절로 가득했으리. 개울 옆의 띠풀 집에서 한가하게 혼자 있는데,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흥취가 넘친다고 했다. 삼은의 기개답게 한가로운 한 때였으리.

화자는 절의와 달관자적 삶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냥 한가한 어느 한 때의 모습을 묘사한 정도가 더욱 좋겠다. 세상과 등지고 살고 있으니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다. 산새가 옆에서 지저귀니 외롭지도 않다. 현대인들은 인공 구조물 속에서 늘 바쁘고 여유가 없다. 찾는 손님은 없지만 산새와 벗하고 대밭으로 평상을 옮겨 누워 책을 보는 도인의 경지도 생각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개울 옆에 혼자 앉아 달과 바람 흥취 넘쳐, 산새 벗한 하루 종일 책상 누워 책을 보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작가는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1374년(공민왕 23)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우왕 9) 사마감시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87년 성균학정이 되었다.

【한자와 어구】

臨溪: 개울에 임하다. 茅屋: 띠풀 집. 獨: 홀로. 閑居: 한가롭게 살다. 月白: 밝은 달. 風淸: 맑은 바람. 興有餘: 흥취가 있다. 흥취가 넘치다. // 外客: 외부의 손님. 不來: 오지 않는다. 山鳥語: 산새와 말을 하다. 벗하다. 移床竹: 대밭으로 평상을 옮기다. 塢: 나무이름. 臥看書: 누워서 책을 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