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교, 6.25 그날의 포성을 기억한다
산동교, 6.25 그날의 포성을 기억한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6.19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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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광주 유일 전적지, 알려지지 못해 아쉬워
4대강 사업 당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해

[시민의소리=김다이 기자] 영상강의 물줄기를 따라 광주 동림동에 70여 년 전 6.25전쟁의 아픔이 깃든 곳이 있다. 차량통행이 멈춘 ‘산동교’는 현재 사람과 자전거만 정도만 다닐 수 있는 다리로 남아있다.

‘옛 산동교’(북구 동림동 122-4일대)는 광주지역의 유일한 6.25전적지다.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고, 한 달이 채 못 된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 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펼친 곳이다.

녹슬고 낡은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산동교는 폭 6m, 길이 228m의 다리로 교각이 아치형 기둥이다. 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국도 1호선의 일부로 건설되어 현재까지 일부 보존되어있다.

물자 등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던 옛 산동교는 6.25전쟁 당시까지 광주의 관문 역할을 담당했었다.

옛 산동교는 4대강 사업인 영산강 폭 넓히기 및 친수공원 확대 등으로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의 반대와 해당기관의 협조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1시간가량 치열한 전투 벌어진 곳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빛바랜 흔적은 아직도 산동교 곳곳에 남아있다. 아직까지 산동교는 광주시민들에게 조차 6.25전적지라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1950년 6.25전쟁은 북측과 남측에 많은 피해를 남긴 전쟁이었다. 광주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0년 7월 23일 이 조그마한 다리 하나를 두고 인민군 정예 6사단과 우리 방어군 5사단은 1시간가량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6.25 당시 호남 방어부대인 5사단의 20연대는 전선으로 이동되고, 26연대가 새로 편성되었으나 호남지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 7월 22일 장성에서 퇴각한 26연대는 광주지역 사수와 북한군의 전차를 막기 위해 7월 23일 새벽 4시경 산동교를 폭파했다.

군경합동부대는 산동교에서 광주 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했다. 7월 23일 오전 11시 30분께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르렀을 때 1시간동안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병력 규모가 1개 대대에 불과했던 우리 방어군은 군, 경찰, 학도병 등으로 구성되어 제대로 된 무기 없이 북한군에 끝까지 맞서 저항했다.

그러나 우리 군경합동부대는 북한군을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23일 여수방향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 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했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작전회의 주목적, 시민들 피난 기회 제공

6.25전쟁 당시 산동교 전투 작전에 참전했던 조귀보(86·당시 경찰 경위) 씨는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조귀보 씨는 “한참 젊은 나이에 총각시절이었다. 그 당시 전남도경에서 전라남도에 있는 24개 경찰서에서 직원들을 차출해서 일개 대대를 입성부대로 만들었다”며 “그 부대는 당시에 해남서장을 하던 장명규 총경이 현지 총경으로 임명되어 바로 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 산하에 4대 중대를 편성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조 씨는 “그 부대는 전라남도에서 여순반란사건과 전투경험이 있는 사람들만 편성해서 대대를 편성했다. 정규군 부대와 똑같았다”며 “서울을 수복탈환작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성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때마침 전라북도 정읍에 인민군 부대가 정읍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귀보 씨는 “인민군이 정읍을 점령하고 전남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경찰국에서 우리 대대를 장성을 경유해서 들어오는 북조군을 대치해서 싸우도록 명령을 하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7월 23일 새벽 3시. 한국중앙국민학교에 집결되어있던 부대가 장성을 향해 출발했다. 장성으로 향하던 도중 장성 남면의 전투상황을 알아본 결과 장성 시내에 이미 북한군이 들어와서 점령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조 씨는 “저희들은 장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지도를 놓고 작전을 한 결과 당시 장명규 총경이 지휘하는 우리 대대가 산동교를 기점으로 산동교를 폭파를 하자는 것이었다”며 “광주시내의 시민들이 피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 작전회의의 주목적이었다”고 떠올렸다.

재현행사 통해 산동교 전투 의의 기념

결국 장성 남면에서 군부대를 산동교 남쪽으로 철수시키고 요지에 배치됐다. 우리 군경합동부대는 산동교에서 작전을 실시했다.

그는 “인민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5사단의 연락을 받고, 산동교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산동교를 폭파를 했다”며 “폭파를 하고 산동교에서 대치하고 있자 인민군 부대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그 뒤에 트럭에 27대에 군 병력을 싣고, 야포부대가 도착했다”고 증언했다.

조귀보 씨는 “광주시 방어 작전은 산동교에서 새벽 6시 반경부터 시작됐다”며 “약 5시간 이상을 교전한 끝에 낮 12시가 되어서 공방전이 펼쳐졌다. 당시 전투로 장명규 총경은 다리가 절단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던 군경합동부대는 끝내 정규군인 북한 인민군의 화력에 밀려 여수 방향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산동교 전투는 우리 방어군의 교전시간동안 광주시민들이 피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이를 기리기 위해 산동교 전투의 재현행사는 지난해 처음으로 시작됐고, 지난 16일 호국보훈의 달의 맞이해 광주지방보훈청은 ‘Remember 산동교, 그날의 포성!’을 주제로 제2회 산동교 전투재현행사를 열었다.

현재 산동교는 다리하나를 놓고 멀리 아파트 단지로 스카이 라인에 둘러싸인 채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하지만 1950년 6.25한국전쟁 그날의 포성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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