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재라! 설상가상의 겹 불행들
애재라! 설상가상의 겹 불행들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6.1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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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들(7)
▲ 이홍길 고문

1980년 5·18 당시의 전두환 살인집단의 만행을 규탄하는 「오월의 노래」는 한 세대를 훌쩍 넘은 오늘에도 부르다 보면 가슴이 처연하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데 갔지’하는 구절이 상기시키는 학살만행의 잔혹상은 ‘전두환을 처단하라’는 절규를 아직도 실감나게 한다.

그런데 학살의 역사는 광주에서만이 아니고, 한국에서만이 아니고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요코하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때 조선인 6000명 이상이 죽어갔다. 조선 사람이 학살대상이었고 집행자는 일제의 경찰과 군대, 자경단, 재향군인회들이었다. 지진으로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10만 명의 사망자와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고, 집단습격과 약탈을 자행한다는 유언비어가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오후부터 유포되기 시작하여 도쿄 전역에 떠돌았다. 군경에 의해 날조된 유언비어는 빠르게 유포되었고 일본인들은 이를 믿었다. 그리고 학살은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철창,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 잔인하게 살해하여 매장하였다. 그러고도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은 2명만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 일본정부는 1923년 11월 15일 현재 피살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일본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6000명을 상회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하의 조선과 조선 사람은 속수무책이었다. 해방된 현재에도 이를 밝히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어디에도 없음이 안타깝다.

역사는 관심 있는 자들의 기억 속에만 맴돌고 흘러가버린 과거는 그냥 묻혀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들은 도처에서 확인한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정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온고지신해야 함을 구두선처럼 읊조리지만 역사는 간혹 크고 작은 파동만 드러낼 뿐 그냥 흘러가버리는가 싶어 무력한데다 유한한 인생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픈 역사를 살아오고, 아픈 현재를 살고 살아온 사람들은 용케 크고 작은 파동에서 비켜났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살아남은 행운을 자축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홀연히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우리들 옆에 없고 다시 있을 수도 없음을 깜짝 놀라듯 깨닫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한 구절 “산자여 따르라”하는 주문에 오금이 든다. 어떻게 따를 것인가 해도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본인의 어떤 책임도 없이, 더욱이 무리지어 죽어간 이들의 죽음의 순간이 전율로 우리들을 덮친다.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을까를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비무장의 조선 사람들, 나라 잃고 생업을 위해 만리타향 일본 땅에 와서 온갖 궂은일을 다한 조선 사람들을 왜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진의 참상을 보고 받은 내무대신 미즈노는 계엄령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여 ‘조선인 내습’을 날조하였다. 이재민 구호와 치안대책을 숙의한 내무대신, 내무성 경보국장, 경시총감 등이 최고의 결정권자였는데, 그들은 1918년 쌀소동 때에도 치안당국자로 민중탄압의 선두에 서서 과잉진압을 자행했던 인사들로 3·1운동 당시 미즈노는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경시총감 아케이케는 총독부 경무국장으로 조선인의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장본인들이었다. 민중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9월 1일 오후 진재의 참상을 둘러본 후 조선인을 그들의 치안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식민의 정통에 대해 조선인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단이었고, 그것은 제거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운동이 활발한데다 불황이 닥쳐 치안 부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1910년, 2000년 역사의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살인폭력으로 진압하고, 1920년 6월, 만주의 독립군과의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분풀이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으로 ‘경신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1921년 워싱톤 회의로 해군확장은 제한된데다 1922년, 일본군의 아무르에서 철수로 시베리아 간섭은 실패하였다. 조선의열단의 움직임 또한 일본 식민 주류세력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가해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는 성 싶다. 워싱톤 회의와 시베리아 철병으로 인한 좌절감이 도둑놈 제 발 저리는 식의 가해자 트라우마와 겹쳐 정신적 아노미 상태를 유발, 천인공노할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망국민의 불행이 가해자들의 아노미현상으로 겹 불행을 당하게 되었던 한국인들의 지난 시간이 안타깝기만 한데, 학살의 잔영은 아직도 아른거리니 무력한 우리들은 초혼으로 영령들을 위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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