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1)
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6.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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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관수정에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宋欽 1459~1547)의 흔적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먼저 가는 곳은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관수정(觀水亭)이다.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송흠이 그의 나이 81세인 중종 34년(1539년)에 지은 정자이다.

▲ 관수정

관수정의 마루 앞면에는 송흠의 시가 ‘원운’이라는 표시와 함께 붙어 있다.

물을 바라보고 우뚝하게 지은 집 여름에도 시원한데

노부(老夫)는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선다.

골짜기는 두 시냇물이 모두 차지하니

어찌 중국 용문의 팔절탄을 부러워하리.

고요한 그림자 물에 잠기니 참으로 즐길 만하고

날이 개이면 비에 씻긴 모습 즐겨보리

천만가지 모습들이 눈을 어지럽게 하는데

맑은 물결 떠다가 내 속마음을 씻고 싶네.

송흠의 시 바로 옆에는 그의 제자이며 친척인 면앙 송순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 관수정 원운

건너편에는 아들(子) 송익경, 하서 김인후, 모재 김안국의 시가 걸려 있다. 1)

그의 제자 양팽손, 나세찬, 안처함의 시도 보인다. 특히 학포 양팽손은 1519년 기묘사화 때 능주에서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기묘명현이다. 이외에도 송흠과 교류한 소세양, 김안국, 홍언필, 성세창, 신광한, 박우, 이문건, 정순명, 정사룡, 임억령, 오겸, 강종수, 유부, 김익수, 노극창, 정희홍, 김인후 등 당시에 쟁쟁한 인물들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이 시 편액들은 중종 시절 호남 선비들의 위상과 중앙정계와의 교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마루 중간에는 송흠이 쓴 '관수정기'가 걸려 있다.

관수정기

내가 보니 하늘의 한 가운데 달이 이르면 황금색과 푸른색이 물에 떴다가 잠기곤 한다. 비단 주름 사이로 문양이 생겨나고, 이슬비 내리다가 잠깐 개이면 짙고 옅은 그림자가 일렁인다.

바람이 불다가 고요하면 물속에서 헤엄치는 고기비늘까지 세어볼 수 있다. 아침 햇살과 저녁 그늘 기이한 모습과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관수정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물결을 보면 물의 근본이 있음을 알며, 그 맑음을 보면 마음의 사악한 점을 씻게 되니, 그런 연후에야 가히 물의 참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자손들은 여기에 힘쓸지어다.

-지지당 주인 자서(自敍)

▲ 관수정기

‘물결을 보면 물의 근본이 있음을 안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물의 철학이 담겨있다. 문득 노자 『도덕경』제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생각난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한편,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렸다. 지방 수령이 부임할 때는 전임 고을에서 말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세 마리 말만 받았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 육조, 제가(齊家 집안을 다스림)편에 나온다.

송흠이 수령으로 부임할 때 마다 신영마(新迎馬)는 세 필 뿐이었으니, 공이 한 필을 타고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을 탔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삼마태수라고 일컬었다.

이긍익(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 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조의 명신(名臣)편에도 송흠이 나온다.

송흠,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이요, 본관은 신평이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耆社 :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와 같았고, 여러 번 1품 품계에 올랐다. 공이 매양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마가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삼마태수’라고 불렀다. <행장>

1) 송흠과 송익경은 부자(父子) 청백리였다. 송익경은 명종 때 청백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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