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9)
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9)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6.0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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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경장각과 우동사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필암서원 서재인 숭의재 앞에는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경장각은 인종 임금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보관한 곳이다.

▲ 경장각

편액은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의 어필이다. 임금이 쓴 글씨는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망사로 씌워져 있다.

▲ 경장각 글씨 : 정조 어필

정조는 1796년(정조 20년)에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한 임금이다. 그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이는 오직 하서밖에 없다고 하였고, 하서를 동방의 주렴계(주돈이, 1017∽1073)와 같은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런데 김인후의 문묘배향 청원은, 하서가 세상을 떠난 지 211년이 되던 1771년(영조 47)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이 올린 상소가 시초였다. 이후 14번의 상소를 통해 25년 후인 179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만큼 하서의 문묘배향은 순탄하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년) 8월29일에 유생 박영원등이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정조는 “내 일찍이 문정공 김인후의 조예는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문묘배향은 매우 큰 전례이다. 몇 백 년 숙제를 가볍게 논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이후 여러 차례 상소가 있었으나 정조의 대답은 한결같이 노(NO)였다.

그런데 1796년(정조 20년) 6월22일 유생 이명채등이 문열공 조헌(1544∽1592)과 문경공 김집(1544∽1656)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이전에 여러 번 청원한 김인후의 문묘 배향 청원은 도외시하고 조헌과 김집의 문묘배향을 청한 상소에 대하여 꾸짖었다. 특히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인데 부자가 함께 문묘에 배향된 전례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7월12일에 유생 채홍신 등이 김인후·조헌·김집의 문묘 종향을 청하자, "김문정과 같은 도학과 문장, 절의와 기국(器局)으로서 참여되지 않는다면 사문(斯文)에 어떠하겠으며 공론에 어떠하겠는가. 조문열의 경우는 위대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다. 또 김문경을 아울러 배향하는 것이 근거가 없음에 대해서는 이전의 비답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다." 하였다. 한마디로 조헌과 김집의 문묘 배향은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정조는 9월15일에 이성보를 파직하였다. 이성보는 처음에는

‘조헌과 김집도 함께 배향해야 한다.’고 하였다가 정조의 뜻이 김인후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김인후만 거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 파직된 것이다.

드디어 9월17일에 정조는 민종현에게 김인후의 문묘배향을 윤허하였고, 11월8일에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했다. 1)

이제 발길을 김인후를 모신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로 향한다. 우동사 명칭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에 ‘하늘이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낳게 했다.’고 극찬한 데서 비롯됐다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동사 문이 잠겨 있다. 관리인에게 연락할 길도 없어서 별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2)

이제 필암서원을 나와서 유물전시관을 구경한다. 유물전시관은 2008년에 개관하였는데 하서의 유물 29종, 3,794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의 이름은 원진관(元眞館)인데 원진은 공자와 주자를 잇는 하서의 위업을 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하서의 흔적은 백화정, 통곡단, 묘소와 필암서원 이외에도 여러 군데이다. 옥과현감을 그만두고 은거한 전북 순창군 점암촌(쌍치면 둔전리)에는 훈몽재와 대학암이 있고, 담양 소쇄원에는 소쇄원 48영 시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 중외공원에는 하서 김인후 동상이 세워져있다.

1) 김인후는 문묘 18현 중 16번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조헌과 김집은 1883년(고종 20년)에 17 · 18번째로 배향되었다.

2) 우동사 사당에는 중앙에 ‘문정공 하서 김선생(文正公 河西 金先生)’이라는 김인후의 위패가, 동쪽 벽에 ‘고암 양선생’이라는 양자징(1523∽1594)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자징은 1786년 2월26일에 정조의 허락을 받아 김인후 신위 왼편에 추배되었는데, 그는 소쇄원 주인인 양산보의 아들이자 하서의 둘째 사위로 거창현감, 석성현감 등을 했고, 김인후의 행장을 지었다.

▲ 우동사 사당의 하서 김인후 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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