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빈민 박흥숙의 ‘독방생활’ 돌아보다
도시빈민 박흥숙의 ‘독방생활’ 돌아보다
  • 이시현 시민기자
  • 승인 2017.06.0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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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나

옛 광주교도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도소 이전으로 곳곳에 잡풀이 무성하고, 천정 일부 구조물은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등 방치된 2년 동안의 흔적이 무거웠다.

1980년 5월 이른바 교도소 습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많은 시민이 근처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일부는 암매장되었던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제37주년 기념식에서 언급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둘러보던 중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얘기가 나왔다. 민주화투쟁을 하다 독방살이를 하는데 가까운 독방에 박흥숙 씨가 함께 수감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광주시는 1977년 10월 전남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국체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이후 무등산에 들를 것으로 판단해 아무런 이주대책을 세워놓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강제철거를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박흥숙은 구청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구속돼 사형이 집행됐다.

박 씨의 독방은 어둡고 칙칙했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에 한낮인데도 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줄기는 가늘었다.

열쇠 수리공을 그만두고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그는 생전 흩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살고 싶었고, 무허가지만 힘들게 집을 지은 뒤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뿌듯해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 씨는 최후진술에서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무허가 판잣집에서 0.75평 독방으로 간 박흥숙 씨. 국가폭력에 희생된 도시빈민 박흥숙은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가운 독방에서 우리 사회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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