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1) 방심(幇甚)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1) 방심(幇甚)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7.05.3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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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손잡고 갓 피어난 연꽃을 구경하네

평생을 직장에서 일하다가 퇴직하고 나면 허무한 자기 인생 역경을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하고 못 찾아뵈었던 친지도 찾아뵙는다. 막걸리 한 잔 거나하게 나누다 보면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마냥 흥에 겨울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으면 게으름을 피우면서 아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그런 시간들이 더러 있기 마련이다. 동중정(動中靜)의 경지라고나 할까. 할 일없이 꽃구경하며 한적한 하루를 보내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幇甚(방심) / 쌍매당 이첨

평생에 뜻하던 일 다 이루기 틀렸고

어쩌랴, 이제는 게으름만 부쩍 느니

낮잠에 잠깬 아이가 갓 핀 연꽃 구경하네.

平生志願已蹉跎       爭奈衰慂十倍多

평생지원이차타       쟁내쇠용십배다

午枕覺來花影轉       暫携稚子看新荷

오침각래화영전       잠휴치자간신하

 

‘아이의 손잡고 갓 피어난 연꽃을 구경하네(幇甚)’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1345∼1405)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평생에 뜻했던 일 이루기는 이미 틀렸고 / 어쩌랴 이제는 게으름만 부쩍 느는 것을 // 부스스 낮잠에서 깨보니 발걸음은 꽃그늘로 옮겨가서 / 아이의 손을 잡고 갓 피어난 연꽃 구경하고 있는걸]이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마음을 두텁게 도와줌]으로 번역된다. 고향 집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벼슬에 전념하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보니 심었던 소나무는 온데간데없었나 보다. 소나무가 없어진 그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호(號)를 ‘쌍매당’이라 했다고 전한다. 쌍매당은 그만큼 하나의 사물을 보는 시야가 넓었던 모양이다.

시인 삶의 역경이 그렇듯이 시에서 보이는 흐름도 진취적인 면은 숨어들고 게으르고 포기한 듯한 시의 흐름을 본다. 자신의 게으름을 스스럼없이 비판한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뜻했던 청운의 꿈은 접은 지 오래됐으니, 어찌하랴 부쩍 느는 게으름이라고 탄식한다.

화자는 느긋한 마음으로 늑장을 부리고 있다. 늑장이라기보다는 바쁜 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이다. 자기 게으름에 지친 나머지 낮잠에서 깨어보니 꽃그늘로 옮겨가 어린 아이 손을 붙잡고 이제 갓 핀 꽃을 구경한다는 느긋한 성격까지 보인다. 아니다.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한 재충전으로 보다 멋진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도 만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평생 뜻 이루기 틀렸고 게으름만 부쩍 느니, 발걸음 꽃그늘로 옮겨 연꽃 구경하는 걸’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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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1345∼1405)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65년(공민왕 14) 감시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13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이 되었고, 이듬해 우정언에 이어 1375년(우왕 1) 우헌납에 올라 권신 이인임, 지윤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10년간 유배되었다 한다.

【한자와 어구】

平生: 평생. 志願: 뜻하던 일. 已蹉跎: 이미 틀리다. 爭: 다투다. 奈: 어찌하랴. 衰慂: 게으름이 늘다. 十倍多: 열배나 많아졌다. // 午枕: 낮잠. 覺: 깨다. 來~轉: ~이 와서 옮기다. 혹은 옮겨놓다. 花影: 꽃그늘. 暫: 잠시. 携稚子: 아이의 손을 잡다. 看新荷: 새롭게 핀 연꽃을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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