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길
아카시아 길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5.3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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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부드럽고 연한 푸른색이다. 숲을 건너오는 바람은 살갑다. 초목은 이제 짙은 초록색으로 색깔을 바꾸고 있다. 대기는 드맑다. 어느덧 5월의 마지막 날을 지나간다. 나는 마치 큰 왕국으로 들어서기 위해 국경선을 넘는 외교사절처럼 이제 마지막 봄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슴 속 설렘 같은 것이 나를 인도한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면 즐겨 걷는 산책길이다. 길옆으로 개천이 있다. 개천은 건천이어서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른다. 개천의 둔치를 따라 아카시아나무가 무성하다. 누가 부러 심은 것 같지는 않다. 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산들에도 온통 하얀 눈에 덮인 듯 아카시아 꽃 사태다.

산책길 내내 아카시아 진한 향기가 공기를 진동한다. 아마도 내 온몸에도 꽃향기가 진하게 적시었을 것이다. 배우 마릴린 몬로가 밤에 잠잘 때 입는 옷에 대해서 기자가 질문하자 “잠옷은 샤넬5”라고 대답했다는데 내 옷은 시방 아카시아 향기로 염색된 옷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산에서는 꿩, 뻐국새, 그리고 딱따구리 말고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새들이 축제를 벌이는 듯한 느낌이다. 못내 ‘봄에 겨워 우는’ 새들의 소리. 이 새가 울면 저 새가 울고 저 새가 울면 이 새가 울고. 꿩이 우는 소리는 목이 쉰 듯 갈라진 소리다. 멀리서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들린다.

뻐꾹새 울음 뒤에는 으레 산울림이 뒤따라온다. 뻐꾹새의 애잔한 울음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딱따구리의 나무를 쪼는 소리가 무슨 기계로 박음질을 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모르면 몰라도 신방을 꾸리려고 집을 만들고 있는 소리일 터이다. 이들 말고도 물병에 물을 들이붓는 듯한 맑은 새소리도 들리고,

나는 아카시아 꽃 한 가지를 꺾어 코끝에 대본다. 폐부 깊숙이 그 향기를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어릴 적에 하던 대로 꽃 한 송이씩 떼 내 입술로 꽃대궁이를 대본다. 꿀맛 같은 것이 살짝 혀끝에 감돈다.

꿀벌은 꿀 한 방울을 모으기 위해 1만 번 이상의 비행을 한다고 한다. 한 방울을 꿀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하기는 향수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는 장미 한 트럭분이 필요하다던가. 물론 지금은 꽃 없이 향수를 만들어낸다니 별 문제지만.

5월의 향기를 다 맡기도 전에 6월로 접어든 느낌이다. 시절은 멈추는 법 없이 칼같이 오고 간다. 탄허 스님은 열반을 가리켜 ‘시공이 끊어진 자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시공을 느끼지 않는 마음자리 같은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닐까. 이 말씀을 5월에 부친다면 5월이야말로 시공이 끊어진 계절이래도 좋을 법하다. 노천명 시인이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노래한 것은 절묘한 표현이다. 열반이니 천국이니 왕국이니 다 같은 말로 들린다. 나의 걸음은 그 5월을 통과하여 전진한다.

하릴없이 두 발로 걷는 것, 향내 진한 5월을 만끽하며 대지를 내딛고 걷는다는 것. 나는 이것을 축복이라고 해석한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아름다운 새소리들, 아카시아 진한 향기, 부드럽고 푸른 하늘, 온몸에 안겨오는 바람. 천국이 있다면 이런 정경이 아닐까싶다.

그러므로 5월은 천국을 살짝 엿보게 해주는 맛보기 코스프레로 비유해도 괜찮을 성싶다. ‘상춘곡(賞春曲)’에서 내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대목은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라는 구절이다. 연이어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까운 듯하다.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라고 혼자 시냇가에 앉아서 바라보는 봄날 선경의 경지를 그리고 있다. 작은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천천히 걷다가 시냇가에 혼자 앉아’의 경지가 그렇게도 내 마음에 안겨든다.

내가 5월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5월을 하나의 독립된 계절로 떼어냈다. 봄, 5월,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에는 다섯 계절이 있다고. 세계를 돌아보면 가을은 캐나다를 넘볼 데가 없고, 겨울은 스위스를 다툴 데가 없으나 5월은 우리나라가 뽐내는 천연자원이라 할 만하다.

아카시아 길은 바람이 불면 아카시아 꽃들이 나비떼처럼 흩날린다. 바람이 잦아들면 나무 그늘에 흰 아카시아 꽃들이 멧방석처럼 쌓여 있다. 꽃을 밟고 가는 길은 생의 절정을 느끼는 듯한 환각을 일으킨다. 이것이 사는 것인가, 하고. 마구 내 감각을 흔든다.

일본의 어느 하이쿠 시인은 ‘내려다보면 떨어진 꽃, 쳐다보면 떨어질 꽃’이라고 세상의 아름다운 이법의 끝을 묘파했지만 내게 두고는 떨어진 꽃도 떨어진 꽃이 아니다.

대체 사람들은 일평생 몇 번이나 5월을 맞이하고 몇 번이나 아카시아 길을 걸을까. 아카시아 길을 걸으며 구태여 세상고락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즐기면 그뿐. 이 찬란한 아카시아 길을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오라, 그 마음에 천국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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