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8)
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8)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5.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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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절당 편액과 동 ·서재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절당의 한 쪽 벽에는 김창흡(1653∽1722)과 윤봉구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김창흡은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인데, 김창흡은 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영수인 큰 형 김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김창흡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1)

그러면 김창흡의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증조부 청음 김상헌의 차운 시이다. 먼저 청절당에 붙어 있는 김상헌의 원운 시부터 다시 읽어보자.

담옹(湛翁)의 풍절(風節)은 나의 스승이라

굳센 글씨 맑은 시 뛰어남을 독차지 했네.

당시에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스러워 마시오.

후대에는 도리어 별운(別雲)이 있었음을 알리니.

湛翁風節是吾師 담옹풍절시오사

健筆淸詩更檀奇 건필청시경단기

莫恨當時俱未識 막한당시구미지

後來還有子雲知 후래환유자운지

김상헌 시는 압운이 1.2.4구의 맨 마지막 한자 사(師), 기(奇),지(知)이다. 김창흡은 이 한자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필암서원 근차 증조고운

겸손하여 남의 스승 되려고 하지 않지만

출처의 기이함은 천추토록 가리기 어려우리.

묵죽도 한 폭 임금의 편지 속에 있으니

이 분의 심사를 임금이 아시리.

 

鞱光未欲作人師 도광미욕작인사

難掩千秋出處奇 난엄천추출처기

一幅霜筠宸翰在 일폭상신침한재

此翁心事此君知 차옹심사차군지

(1717년 정유년 안동인 김창흡)

한편 김창흡의 시판 바로 옆에 윤봉구의 시판이 있는데, 윤봉구도 청음 김상헌의 시를 차운하여 지었다.

필암서원 차 청음선생 운

선생은 백세토록 스승으로 섬길 분이니

출처는 오직 떳떳하여 기이함은 아니지요.

일시에 강개하여 그리한 것 아니며

모두가 도의를 따라 배워서 알았기 때문이라오.

 

先生百世可爲師 선생백세가위사

出處惟常不是奇 출처유상불시기

非若一時慷慨做 비약일시강개주

皆從道義學而知 개종도의학이지

윤봉구(1683∼1767)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1) 청도군수가 되었고,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1763년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청절당에는 어윤중 등의 시판들도 걸려 있지만 일일이 시를 소개하지 못하여 아쉽다.

한편 청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원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동재의 이름은 진덕재(進德齎)이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齎)이다.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썼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김인후 신도비와 묘비명, 필암서원 글씨와 편액들이 대부분 서인과 노론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2)

1)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 말년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허약하자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노론은 10월에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이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1721년 12월에 김일경 등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했다. ‘신임사화’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대신은 사약을 받았고 수 백 명의 노론이 제거되었다. 그런데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정권을 잡았고 김창집의 관작은 복구되었다.

2) 정철 · 김상헌은 서인이고 송시열 · 김수항 · 윤봉구 등은 노론이다. 서인은 1683년에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으로 갈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은 송시열이 1682년에 지었고, 청백리 지지당 송흠 신도비문은 윤증이 1683년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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