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의 젊은 넋들을 초혼한다(5)
6·10항쟁의 젊은 넋들을 초혼한다(5)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5.2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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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한 세대를 지나 광주의 오월은 대한민국의 오월이 되어 촛불혁명으로 민주, 민권 승리의 금자탑으로 그 찬연한 부활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6·10항쟁이라는 거국적 항쟁을 겪고 나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저지른 광주의 대학살극은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상흔이었다. 복지사회건설이라는 미사여구로 사실을 은폐하여 저들의 만행을 호도하려고 광분하였지만,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데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이야 오죽했을 것인가? 오월 그날이 오면 끓는 피를 억제할 수 없는데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하는 부채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젊음은 없었다. 적반하장으로 광주학살극을 기획, 연출한 전두환 살인집단은 폭력적 통제로 그들의 지배를 관철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불씨는 항쟁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운동을 발단으로 불타올랐고, 운동의 진원지였던 전남대학교의 운동조직들은 재정비되거나 창립되었으며, 대학교에서 제적당하거나 졸업한 학생들은 구차한 취업보다 노동현장, 농촌현장에 진출하여 대중에 기반을 둔 반독재민주화 역량을 비축하고 양성하고 있었다. 대학 내에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악법개정 요구 등 학내의 전반적인 민주화 요구에 호응해가고 있었다.

1984년에 이르러서는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전남사회운동협의회 등이 결성되어 조직운동의 역량이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정비된 운동역량은 정치투쟁의 전위역할과 함께 민중생존권투쟁을 지원, 대중운동의 밑바탕을 강화하여 나아갔다. 1986년에 결성된 광주지역민주노동자생활임금쟁취투쟁위원회, JOC운동 등도 그 성과의 주요 부분이었다. 농민운동의 조직화도 진행되어 ‘농가부채해결 전국농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농민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것들은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의 역량으로 점차 전이되고 있었다. 기독교농민운동, 가톨릭농민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종교들도 민주화를 돕는 바람막이가 되어주었고 YMCA, YWCA도 운동의 피난처 구실을 해주었다.

이렇게 운동역량이 결집,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의 분신 항의가 잇따르고 있었다. 표정두 열사는 “내각제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등의 요구를 분신으로 결사 주장하였다. 1987년 4월 27일에는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추모식을 갖고 “민족염원 말살하는 신호헌론 분쇄하자”는 구호를 외쳐 정부의 정치적 음모를 부정하였다. 지난 1987년 1월 15일,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치사 당했다. 치안본부장 강창민은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하고 치자 억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 경에 사망하였다”고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하였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는 여론을 비등케 하였다. 신문들도 이를 대서특필하고 그동안 침묵하던 대한변호사협회도 검찰을 질타, “우리 헌법의 이념인 민주적 기본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한 전 국민적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함”을 호소하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고문살인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을 통해 “박종철의 죽음이 이 어두운 시대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양심의 죽음”이라고 규정하고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부의 내각제개헌에 반대하는 직선제개헌세력을 고무하였고, 전두환 일당은 4·13조치를 발표, 개헌논의 유보, 현행헌법을 통한 정부이양, 대통령선거 연내실시 등을 제시하며 개헌논의를 원천봉쇄코져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는 사회 제 세력을 개헌운동으로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조직화된 시민사회 내부에도 자생적인 동원의 잠재력이 양성되어 있었고 이것들이 이후 투쟁과정에서 전국을 누빈 넥타이부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조직되어 전국 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학생들의 시위투쟁도 가열차게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죽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민주화 요구는 전국에서 요동쳤고 지배세력들은 6·29선언으로 사태 수습에 나서 양보전략의 꼼수로 집권연장에 성공하였다. 극단적 대립에서 오는 파국을 불안해하는 민심이 지배세력의 양보전략을 민주화의 연착륙으로 수용함으로써 운동의 한계를 노정하였다. 그 사이에 희생한 고귀한 젊음에 우리 모두가 빚지고 산다. 초혼의 제의에 촛불혁명의 성공을 알려 열사들의 영생을 손 모아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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