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재수에 성공한 문재인, 그는 누구인가
대선 재수에 성공한 문재인, 그는 누구인가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7.05.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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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약 10년 만에 정권 교체
국민에게 41.1%(13,423,800표) 지지받으며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
▲ 문재인 대통령. 출처=문재인 SNS(인스타그램)

박근혜 탄핵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조기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낙선했던 지난 2012년 제18대 대선에 좌절하지 않고 재수에 성공한 문재인은 제19대 대선 전부터 ‘대세론’을 입증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약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하지만 수석입학과 문과 1등 

문재인은 1953년 1월24일에 경상남도 거제에서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아버지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흥남철수’ 때 자유를 찾아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을 제시하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나, 수입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해야만 했다.

문재인이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영도로 이사했다.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난 때문에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정기적으로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 배급을 받으러 온 문재인에게 수녀들이 귀엽다며 자주 사탕과 과일을 쥐어주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는 수녀들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감화가 되어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문재인은 가난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1965년에 남항국민학교를 졸업한 문재인은 당시 명문이던 경남중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당시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광주로 치면 광주서중-광주일고 라인에 수석입학이라 할 수 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술·담배에도 손을 대고 4번의 정학을 받으며 ‘문제아’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렇게 그는 결국 서울대 상대 입시에 실패했다.

졸업 후 문재인은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경희대학교의 설립자이자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이북출신 조영식 박사가 문재인에게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였고, 문재인은 그 권유를 받아들여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시절 유신반대 시위 주도로 두 번의 구속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법대 시절 운동권으로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집회를 주도하다 1975년 4월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와 더불어 강제로 군에 징집 당하는데 특전사에 배치된다. 전방 특전사시절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발하는데, 복수를 위한 A급 정예요원으로 차출되어 비무장지대를 넘어가기도 했다.

▲ 특전사 시절 모습

군대 복무 중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78년 제대 후 부친을 잃은 마음에 전남 해남 대흥사로 내려가 공부에 매달려 79년 사시 1차에 합격한다.

1980년 학교로 복학한 문재인은 사시 2차를 치르고 또 다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지면서 실시된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다. 청량리구치소에 수감 중 경희대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 아래 제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후에 극적으로 석방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동기였던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등 걸출한 인재들 사이에서도 1등을 한다. 사법연수원 시험성적이 차석이었고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판사는 물론 아무런 임용도 되지 않았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한 합동법률사무소

이후 문재인은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오랫동안 인권변호사 생활을 한다. 전 노무현 대통령과 만남의 시작이다.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실은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억울한 서민, 노동자들의 센터가 됐다.

88년, 노무현이 시민세력 추천과 김영삼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어 국회로 진출하게 되자 문재인은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했다.

이후 문재인도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했다.

특히 2002년 대한민국 제3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 사진 출처=문재인 캠프

우여곡절 끝에 참여정부가 출범되고 노무현은 문재인을 불러 민정수석으로 지내길 간곡히 부탁하여 입각한다. '왕수석'으로 불리우며 정무수석으로서 존경도 많이 받았던 문재인은 과로로 치아 10개가 빠지며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에 악화가 왔고,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트래킹 도중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 대변인으로 적극 방어한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 등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2006년 11월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그는 성공했지만 군림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돕고 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으며,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보여준 모습과 짱짱한 이력으로 야권 대선 후보들 중 지지율이 제일 높았으며, 2012년 4월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두 달 뒤 민주통합당의 대선 예비주자의 한 사람으로 6월초, 출마를 결정하게 된다.

▲대선 재수에 성공하기까지

무소속 대통령 예비후보로 나선 안철수와의 단일화에서 여러 파열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양보와 지지 선언을 얻어내면서 박근혜와의 양자대결 구도를 만들어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중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약 100만표 차이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를 맞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는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도식을 기점으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현안에 대한 입장도 자주 밝히며 대선 재도전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2014년 12월29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는 당 대표가 되면 2016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출마 선언 이후 약 5개월 만에 박원순 현 서울시장을 제치고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탈환했다.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전당대회에서 41.8%를 얻은 박지원 후보를 앞선 45.3%를 얻으며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당선됐다. 그 해 10월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이 바뀐다.

친문 프레임을 뚫지 못하고 안철수가 탈당하는 분당 사태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지만,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하며 지난해 4·13 총선을 여소야대 승리로 이끌었다.

제19대 대선을 준비하던 차 지난해 하반기에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게 된다. 분노한 국민들은 추운 겨울 촛불혁명을 치루며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해임 판결이 이어지면서 문재인이 적폐청산에 최적화된 적임자로 눈길이 쏠린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에게 향했던 보수표심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 몰리며 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까지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으나 41.1%(13,423,800표)의 지지를 받으며 제19대 대통령으로 끝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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