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33)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 이복수
남도의 멋을 찾아서(33)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 이복수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5.0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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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품어낸 울림, 악기장의 숨결
심장을 뛰게 하는 소리를 만나다

우리나라 전통악기는 가야금, 거문고, 북, 장구, 해금, 태평소 등 60여종에 이른다. 이 악기들은 서양악기보다 더 깊은 울림과 구슬픔이 있다.

이러한 전통악기를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악기장’이라고 부른다. 악기장으로 지정 받기 위해서는 3대가 형성된 계보가 있어야 한다.

故 김광주 선생의 문하에서 국악기 제작을 배운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2호 기능보유자 이복수(64) 선생은 광주 남구 서동에서 ‘광일국악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김명칠-김광주-최동식,조정삼-이복수로 이어지는 악기장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전통악기를 만지고, 연구해왔다. 그렇다보니 전통악기라면 도가 텄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유년시절, 농악대로 접한 전통국악

이복수 선생은 전북 완주군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해야 진학할 수 있었던 시절. 그 당시 진학률이 30%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을 봐야 했었지만, 그는 중학교 시험에 거뜬히 합격할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 보다 수재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러나 농사일을 하길 바랐던 부친의 반대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일본 강제징용을 다녀온 부친이 일본에서 호되게 착취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복수 선생은 “당시 징용을 갔던 아버지께서는 일본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에게 착취를 당했었다고 털어놓으셨다”며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공부 좀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간에서 착취하는 역할을 맡아서 아들이 공부를 잘하게 되면 나쁜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에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고 병상에 있던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셨다”고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철저하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을 믿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농악단의 총무를 맡았던 큰 형의 권유로 공연을 다니며 전통국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농악단은 기예에 가까운 포괄적인 공연을 소화했었다. 그는 “상모돌리기, 병 놀이, 줄타기 등 전통악기 연주를 하고 재주를 부리는 모든 것을 스파르타식으로 배우던 시절이었다”며 “김제, 익산, 완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악단으로 ‘호남우도농악’의 뿌리였다”고 말했다.

   
   
 

가장 만들기 힘든 국악기는 ‘현악기’

그는 공부의 끈을 놓지 못했고, 너무 힘든 허드렛일을 하던 탓에 농악대에서 도망쳐 나왔다. 이후 전주시내로 나와 주간에는 일을 하면서 야간에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다.

이복수 선생은 16세의 나이에 국악기 제작소를 찾아 “열심히 일을 할 테니 학교만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다. 김광주 선생의 눈에도 띄었던 그는 마침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통악기를 배우는 법을 어깨 너머로 눈치껏 익혔고, 학업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완산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사이클 전북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전통악기를 만드는 일을 주업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복수 선생은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느냐, 프로 선수 세계로 가느냐 갈림길이 있었는데 프로의 세계로 가기로 마음먹고 실업팀으로 갔었다”며 “그러나 나중에 부도가 나면서 선수들은 그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대기 상태가 되어버렸었다”고 떠올렸다.

이후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고, 제대를 하게 되면서 다시 김광주 선생을 찾아가 전통악기를 만드는 일을 잡게 되었다. 최동식 선생으로부터 거문고 제작법을 이수하였고, 각종 전통악기 제작 기술을 몸소 체득해 장인의 정도에 들어서게 됐다.

그가 만들 수 있는 전통악기 종류만 해도 27여종에 달한다. 이복수 선생은 가장 만들기 어려운 전통 국악기로 단연 ‘현악기’를 꼽는다. 그는 “현악기의 음을 제대로 뽑아내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나도 40세 말~5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우치고 느꼈다”고 말했다.

수년 동안 세월을 품어 비로소 울림

가야금, 거문고를 만드는 주재료인 오동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크는지 오랜 기간 동안 지켜봐야 했다. 이복수 선생은 직접 산으로 들어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과 양을 터득하게 되면서 악기의 주재료인 나무를 고르는 안목을 스스로 깨우치게 됐다.

그는 토양이 좋지 않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악기를 만드는 게 울림과 떨림이 훨씬 풍부하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적절한 목재를 확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조건이 맞는 목재를 구한 이후에는 틈이 생기지 않고 좀이 먹지 않도록 나무의 진을 빼는 작업을 한다.

이복수 선생은 “진정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5년~10년은 걸린다”며 “오랜 기간동안 진을 빼는 염장을 하고 건조, 숙성을 거쳐야 전통악기의 재료로써 가치가 생긴다”고 말한다.

광일국악사 2층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30~40년이 훌쩍 넘은 목재재료가 가득 쌓여있다. 이복수 선생의 보물 1호기도 하다. 작업실 가득 놓인 대패, 톱, 망치, 끌, 자 등 연장이 그동안 오랜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오랫동안 잘 관리된 목재를 가지고 대패질과 망치질, 풀질을 하면서 가야금, 거문고를 만든다. 이외에도 대금, 중금, 소금, 대금, 북, 장구 등 다양한 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악기 제작뿐만 아니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을 이수 받아 기능과 예능을 겸비했다.

2010년에는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전통 기능인, 이어갈 환경 열악해

이 선생은 “우리나라의 전통 분야 중 기능인, 예능인이 많이 있지만, 특히 전통악기를 배우고, 만드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있다”며 “먹고 살기 힘들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이 안하게 되고, 밥벌이 수입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전통의 맥은 점점 이어가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악기를 제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최소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한다.

다행히 이복수 선생의 아들과, 처남, 딸이 악기장의 기능을 배워 전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기술과 기능을 보유한 사람이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보다 노동력에 중점을 두고 더 대우를 받는다”며 반대되는 우리나라의 환경을 한탄했다.

전통악기 제작을 통해 옛 것을 이어가는 장인의 손끝에서 오늘도 남도의 멋이 탄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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