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계절의 초혼(3)
꽃피는 계절의 초혼(3)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4.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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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죽고 참에 살자”던 4·19영령들의 결단
▲ 이홍길 고문

1960년 4월19일 서울.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로 거리들은 메워졌고 “대통령 부통령 선거 다시하라”는 함성은 하늘에 치솟았다. 세종로 일대를 가득 메운 데모대 중에서 “대통령한테 따지자”는 외침이 나왔다. 그에 따라 물밀 듯 데모 대오는 경무대를 향했다. 학생 물결이 중앙청 뒷문 통의동파출소에 이르자 경찰들이 학생들을 향해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사했다. 학생들은 행렬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아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가 나타났다. 학생들이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대통령 집무실로 가자”, “이승만을 만나자”고 외치면서 대오는 격렬하게 움직이고 바리케이드는 무너지고 소방차는 뒤집혔다. 오후 1시 경찰들은 학생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학생들을 향해서도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수 십 명의 학생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학생들은 한발 한발 저지선을 돌파하며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경찰의 발포로 의에 죽고 참에 사는 영혼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졌다.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에도 굴하지 않고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울면서도 「전우가」를 목메어 부르기 시작했다.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 대오는 광주, 부산, 대전, 대구, 인천 등에서도 맥맥히 물결치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과 시민은 4·19혁명 투쟁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으며 수 만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항쟁은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하층 노동자와 무직자들의 참여와 희생도 두드러졌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던 다짐처럼 진리와 진실의 길은 모든 현실이 초월되고 참이라는 진리만이 우람하게 확대되어 온 가슴에 담뿍 찰 때 찾아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을 어찌 소홀할 수 있을까 만은, 중요한 것들은 큰 결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에서 용기를 제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혼자 결코 못 이루고 이웃과 모두가 함께 이룬다. 어느 시인이 읊은 것처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소쩍새가 밤마다 그렇게 울어댄다는데, 자유와 민주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위하는 길이 나 홀로 그리고 쉽사리 이루어 질리는 결코 없다. 삼일만세운동도 중국, 일본, 러시아, 조선의 곳곳에서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소망들이 사상과 종교, 지역을 뛰어 넘어, 민족의 자존과 자유를 위해 똘똘 뭉쳐 하나가 되었다. 어디서 먼저 했다, 누가 더 힘차게 외쳤다, 누가 더 큰 희생을 했다는 부끄러운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모두가 함께 3‧1만세운동이면 족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만 이야기되는 신간회운동도 일제하에서 민족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협동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자는 운동으로 누가, 어느 지역이 중심이고 먼저였느냐 하는 ‘도토리 키재기’는 없었다. 한국민주화운동의 민주, 민중적 기점이 되는 4‧19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운동에 있어서도 ‘도토리 키재기’식의 분란이 없기를 바라면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출판한 〈한국민주화운동사〉와 ‘희망4‧19신문’이 전하는 1960년의 4‧19일지를 개관했다. 대구 고교생들의 2‧28투쟁을 비롯해서 전국 28개 시를 넘는 지역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4월26일까지 줄기차게 있었고, 그 중 서울, 마산, 부산, 광주 등지에서 희생자를 낳았다.

장병준 평전을 통해 광주 3‧15민주주의 장송데모의 전모가 서사되는데,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은 분명하나 4‧19혁명의 시원으로 강변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변거리가 될까 우려한다. 광주 3‧15는 당시 민주당 광주시당의 정치활동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면서 그냥 광주 3‧15로 기념할 수 있기를 바란다. 4‧19는 한국 민주화의 기점이면서 민주‧민중주체 각성의 위대한 계기였음을 밝혀둔다.

민주, 민중세력의 입장에서 회고할 때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가열 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연속으로, 우리들에게는 역사적 승리의 이정표가 없었다. 찬란한 승리로 발전시키지 못하였지만 부정부패의 독재권력을 타도했다는 기억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했고, 그 실감이 오늘의 촛불혁명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4월혁명을 가능하게 한 영령들을 추모하면서 초혼제의를 마련해서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을 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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