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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의 [팬텀 싱어]여, 영원하라!
김영주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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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31  16: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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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70시절, 그 시절은 나에게 가슴 시리도록 눈부신 청춘이었다. 그 청춘의 한 가운데에 이른바 ‘쎄시봉’이라고 일컫는 송창식 · 윤형주 · 김세환 그리고 이장희 · 김정호 · 조영남 · 어니언스 그리고 양희은 · 박인희 · · · 의 ‘포크송’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2년 전에 그 이야기를 그려낸 [쎄시봉]이라는 영화에, 난 그토록 절절한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내가 가장 즐기는 예술분야는 단연코 영화이고, 그 다음을 꼽으라면 노래이다. 노래에서도 정태춘의 ‘봉숭아’ · 이동원의 ‘향수’ ·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 정오차의 ‘바위돌’ · 고복수의 ‘타향살이’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와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 그리고 가곡 ‘청산에 살리라 · 동심초 · 그리운 금강산’을 가장 즐기고 자주 부른다. 

우리 국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대금이나 가야금과 해금 연주를 즐기지만, 판소리를 매우 즐긴다. 스물 시절에 우연히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만나서 한 소절을 흉내내고 그 뒤 끝에 ‘진도 아리랑’을 덧붙여 부르는 노래로 무려 30여 년을 무던히도 우려먹었다.(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동생이 부르는 걸 녹음해서 흉내내어 배운지라, 발성도 창법도 엉터리다. 그래도 눈곱만큼 스며나는 조선 토종 냄새에, ‘또랑 광대’에도 끼어들지 못할 ‘얼치기 가락’을 사람들은 열광해 주었다. )

이렇게 나는 평생을 노래와 가까이 더불어 살아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노래를 좋아한 건 아니다. 중고등시절부터, 난 오페라의 ‘벨칸토 창법’을 싫어했다. 애당초 왜 싫어하는지 몰랐지만, 나중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람들마다 갖는 자기만의 음색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창법은 살아있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그 어떤 꼭두각시의 억지로 길들여진 위선적인 발성으로 느꼈다. 그래서 갑돌이 노래와 길동이 노래를 구별하기 어려웠고,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음색에서 우러나는 감정적 생동감을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한 마디로 그건 내게 미이라처럼 ‘메마른 박제물’이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추앙하는 예술에, 나는 왜 이렇게 삐딱한 걸까? 서양문화가 그 거룩하고 숭고한 신에게 바치는 찬양에 인간의 냄새를 없애는 순결함을 갖추려는 노력에서 비롯하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인간의 냄새’라는 게 숭고한 영혼의 반대쪽에서 이글거리는 육체의 욕망이고, 엄정한 이성의 반대쪽에서 날뛰는 감정의 찌꺼기이다. 그 인간의 냄새를 없애는 순결함을, 난 “살아있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그 어떤 꼭두각시의 억지로 길들여진 위선의 가면”처럼 느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벨칸토 창법이 그토록 싫으면 함께 어울려 놀지 않으면 되는데, 우리 가곡에 좋아하는 노래가 있었다. 목련화 · 봄처녀 · 비목 · 청산에서 살리라 · 그리운 금강산 · · · . 그래서 난 이 노래들을 일부러 ‘포크 창법’으로 내 음색을 살려서 불렀다. 

그리곤 언젠가 유심초의 ‘별이여 사랑이여!’를 일부러 ‘벨칸토 창법’으로 불러보았더니 노래가 아주 맛깔났다. 금수현의 가곡 ‘그네’를, 장난스레 ‘벨칸토 · 뽕짝 · 째즈 · 포크’라는 네 가지 창법으로 뒤섞어서 불러보았다.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좋아했다. ‘장사익의 찔레꽃 · 이연실의 찔레꽃 · 백난아의 찔레꽃’을 내리이어서 부르는 ‘찔레꽃 3부작’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게다가 난 지난 10여 년 동안, KBS FM1 [세상의 모든 음악]을 하루 10시간 가까이 들으면서 라틴 음악 · 스페인 음악 · 그리스 음악 · 러시아 음악 · 이슬람 음악 · 인도 음악 · 동남아 음악 · 중국 음악 · · · , 수없이 다양한 음악을 만났다.

내가 주섬주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1955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난) 우리 세대가 그런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이렇게 가히 ‘잡탕 문화의 세대’라고 할 ‘격동하는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야 했다. 

우리 문화가 중국문화 · 일본문화 · 미국문화 · 유럽문화와 어우러지면서, 동양 전통문화와 서양 근대문화 사이에서 상류층 문화와 서민 대중문화가 요동을 치고 뒤섞이며 휘몰아쳤고, 그게 다양하게 만나고 섞여들면서 최근에 음악 분야에선, ‘크로스 오버’라거나 ‘월드 뮤직’이라고 불렀고, 그 중에 하나의 물결이 이른바 팝(Pop)과 오페라(Opera)의 만남이라는 ‘팝페라’의 뮤지컬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나의 노래인생은 ‘크로스 오버’의 물결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 스스로 즐기다가 생겨난 갈증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내 개인의 작품들이다. “벨칸토는 지나치게 엄정하여 건조하다. 뽕짝은 감정이 지나치게 넘쳐서 흐물흐물하다. 째즈는 지나치게 분방하여 어수선하다. 포크는 지나치게 간질거리며 여리다. 

국악은 너무 개성이 강해서 다른 음악과 잘 어울리질 못한다.” 그래서 나는 라틴음악과 그리스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클래식의 단정함과 포크의 간결함을 잡고서 깔끔하게 샤우팅하는 걸 즐겼다. 그러하다보니 내 나름대로 찾아낸 노래가 우연하게도 ‘팝페라’와 엇비슷했다.

   
 

음악영화를 좋아하지만, 음악회나 팝페라까지는 찾아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KBS FM1의 ‘세상의 모든 음악’으로 다양한 음악을 향한 갈증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하다가 JTBC의 뉴스룸 뒤 끝에 우연히 [팬텀 싱어]를 만났다. 단박에 빨려들었다. 그 동안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만나는 수많은 음악 중에서 열광할 만한 우리나라 팝페라 가수들의 크로스 오버 노래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팬텀 싱어]엔 바글바글 많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아! [팬텀 싱어], 대박!!!” 이토록 좋은 가수들이 그 동안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퀀텀 싱어’라는 불빛에 우르르 몰려드는 불나방처럼 나타났을까? 팝페라 장르가 음악 안에서 하나의 장르로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일 게다. 

성악 쪽이 자기 우월감에 빠져서 다른 음악에게 굳게 빗장을 걸어 잠갔다. 이어서 문득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 그 동안 이런 훌륭한 재목들이 세상에 드러날 마당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구나! 둘, 그런 마당이 없으니까, 훌륭한 재목들이 그저 그런 재목들에게 덮여서 제대로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JTBC 홈페이지에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어둠 속의 숨은 실력자. 천상의 보이스를 숨기고 살아온 가면속의 꽃미남들. 우리는 그들은 ‘팬텀’이라 부른다. 

팬텀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지상최후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순간, 그들은 ‘팬텀싱어’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팬텀 싱어]에, 우린 “누가 누가 더 잘하나?”에 관심이 많겠지만, 그것보다는 성악의 교만을 깨뜨릴 마당이 생겨났다는 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지금 이 글로 “누가 누가 더 잘하나?”를 말하기엔, 이 글마당이 너무 좁을 뿐만 아니라 그게 오히려 번거롭다 하겠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그 동영상들을 직접 만나보는 게, 글자 그대로 “百聞이 不如一見이다.”고 하겠다. 그들의 노래가 초점이지만, 심사위원들의 표정과 논평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들의 논평에 동의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지만. 가수들과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손을 노래가락에 실어 나르다가 온 몸에 절로 추임새가 일어난다. 감동하여 절로 박수를 치다가도, 그것도 모자라서 감동의 눈물이 쏟아지기까지 . . . .

<명장면 보기> http://tv.jtbc.joins.com/clip/pr10010427/pm10037055

감동의 눈물까지? 그렇다. 한 두 곡이 아니다. 김현수의 ‘사랑의 묘약’ · 이동신-곽동현의 2중창 ‘카루소’ · 고은성-고훈정의 2중창 ‘Show must go on’ · 고훈정-이동신-이준환 3중창 ‘루나’ 그리고 유슬기-백인태의 2중창 ‘위대한 사랑’ · 유슬기-백인태-박상돈의 3중창 ‘사랑이 시로’ · 유슬기-백인태-박상돈-곽동현의 4중창 ‘사랑이 움직인다’ 이 중에서도 ‘사랑의 묘약’ · ‘위대한 사랑’ · ‘카루소’ · ‘루나’ · ‘사랑이 시로’는 그 감동의 눈물을 멈추기 힘들었다. 

딱 하나만 꼽으라면 ‘카루소’이다. 가수를 꼽으라면, 김현수 · 유슬기 · 고훈정 · 곽동현인데, 한 명만 꼽으라면, 곽동현이다. 그는 락커이다. 그 어떤 노래도 그 노래에 딱 들어맞게 요리하고, 그 맛이 절묘하다. 그의 최고 무기는 극강 고음이다. 그리고 그 극강 고음을 내지르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거기에 매서운 고추맛을 담아내거나 단단한 얼음을 씹어낸다. 그 소리와 그 맛이 놀랍고 놀랍다. 

그 맛을 처음 만난 ‘카루소’에서 너무나 놀랐다. 마지막 결승전의 경희대 무대가 너무 넓고 메아리가 너무 겹쳐들어서 그의 그 맛을 잡아내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1등을, 고정훈 팀이 먹었는데, 난 유슬기 팀이 먹어야 한다고 보는데 아쉽다. 그게 어떠하든, 문화예술계엔 대박이고, 나에겐 감동이었다. “[팬텀 싱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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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팝페라(Popera)

팝(pop)과 오페라(opera)의 합성어로,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음악스타일 또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킨다. 1997년 <워싱턴포스트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음악 장르로까지 자리잡았다.

팝페라는 1980년대부터 불어닥친 크로스오버 붐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형태지만, 클래식의 엄격함을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하게 노래한다는 점이 대중에게 크게 부각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의 소프라노 사라 브라이트만, 메마 샤플린, 맹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대중적인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팝페라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장르가 되느냐 크로스 오버에서 머무르냐는 두고 봐야 할것이다. 시대에 따라 오페라 자체 변하듯 오페라는 그 자체로써 이미 한참 전에 형태의 완성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디오 티비와 인터넷 등의 등장으로 인해 예술장르에 대중매체 대중미디어의 매체적 특성이 함께 융합하여 기존의 오페라(opera)를 대중음악인 팝(pop)과 결합하여 좀 더 현대의 대중이 친숙하게 접할수 있도록 새로 개척 혹은 융합된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팝페라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오페라의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매끄러운 음색과 팝뮤직에서의 친숙한 후렴구 리듬감을 느낄수 있다. 가사 또한 영어로 된 가사를 끼워넣어 시종일관 하나도 모르겠는 전통 오페라 (주로 이탈리아어 불어 독일어)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효과도 있다.

전통 미술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복사방식을 넣어 대중화의 개념을 도입한 팝아트처럼 팝뮤직도 일종의 대중화 개념을 혼합하였다고 봐도 되리라 본다.

팝페라의 흐름에서 빅히트를 꼽자면 최초의 빅히트는 미국올림픽에서 공연했던 쓰리테너(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를 꼽을수 있는데 더 나가 파바로티는 "파바로티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스팅 같은 팝 뮤지션과 공연을 함께하게 되고, 그 후 쓰리테너와 파바로티 친구들 기획은 클래식 음악시장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횡재와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팝페라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앤드루 로이드 웨버다. 그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 수많은 대작 뮤지컬을 작곡한 레전드 작곡가인데, 이들 뮤지컬의 주요 넘버들은 그냥 유명한 수준을 넘어 빌보드 등의 수많은 차트를 휩쓸어서 오페라 같은 고상한 성격이 짙었던 뮤지컬 노래인데도 대중가요에 준하는 수준으로 유명해졌고, 그 결과 의도하지 않게 팝페라라는 장르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팝페라 가수로 잘 알려진 사라 브라이트만은 1980년대 초 캣츠 웨스트엔드 공연에서 제미마 역으로 "Memory"를 부르는 그리자벨라를 옆에서 격려해주는 고양이역을 따낸 신인배우에 불과했는데, 로이드 웨버가 브라이트만에게 완전히 빠졌고(결혼해서 배우자가 있었는데도!),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점찍어놓고 작곡한 ‘오페라의 유령(뮤지컬)’이 초월적인 히트작이 되자 사라 브라이트만 역시 세계구급으로 떴다. 

그러나 결혼 6년만에 이혼... 어릴 적부터 성악 교육을 받고 뮤지컬계에서도 역량을 인정받은 덕에 그녀는 뮤지컬계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무대를 넓히며 팝페라 계에서 손꼽히는 가수가 되었다.

팝페라 스타일이 하나의 장르라고 하기에 아직 애매하므로, 굳이 그 원형을 알고 싶으면 안드레아 보첼리의 앨범을 듣는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 하겠다.

다른 방식으로 팝페라 카테고리의 음악찾기를 편하게 생각하면

1. 정식 성악가가 아닌 가수가 클래식 성악곡을 가요창법으로 부르는 경우

2. 정식 성악가라도 성악 창법을 이용하지 않고 편안한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는 경우

들이 팝페라에 포함될수 있다고 할수있겠다.

또다른 방식인 기술적 측면으로 정의하자면 누가 부르거나 어떠한 창법으로 부르든, 일단 관현악에 기초한 반주가 존재해야하고 기존 클래식 음악을 연상케 하는 편곡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그 지표가 될 수 있겠다.

팝(Pop)과 오페라(Opera)의 합성어로, 오페라를 팝 창법으로 부르는 등 양쪽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영역이다. 사라 브라이트만,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대표적인 팝페라 가수이다.

근래 들어 별도로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 그 의미를 학문적인 수준에서 조명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낄 만큼 크로스오버라는 새로운 대중음악 현상이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2003년 10월, 국내 어느 대학교 음악 연구소에서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의미 있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최근 영역이나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섞임이 있는 음악 현상에 대한 배경과 구조에 대하여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전통음악과의 구분에 대한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별을 위한 경계가 모호하지만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큰 편 가름이 가능하리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무용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의 틀 안에서 파악하자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고, 이 부분에 대하여 꽤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체로 미학적인 관점에서 종래 예술음악과의 우열을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차이를 찾자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여기에는 대중음악의 상업성이나 예술적인 미학의 하향 평준화라는 우려와 비판에 대한 논지가 이어졌다.

크로스오버 현상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례가 거론되기도 했다. 라비 샹카를 비롯한 동방전자악 요소와의 섞임의 사례를 들기 위하여 프로젝트 화면과 오디오를 동원한 것은 아주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예컨대 비틀즈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음악 중의 섞임에 관한 내용이나 인용음악의 사례들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역시 단순치 않은 문화 현상으로, 아직도 어떤 변화 과정으로 인식하는 정도였고, 개념을 논하거나 결론을 추론하는 것은 유보하는 입장이었다. 요컨대 담론의 장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어야 할 터였다.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거론되던 이야기 외에 새롭게 대두되는 논지는 별로 없었다.

이 모임에 참관하고 받은 몇 가지 아쉬웠던 인상은 이런 것들이었다. 발표자들이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새로운 흐름을 설명코자 했으나 이는 대단히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들로, 커다란 흐름을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개별적인 현상을 망라할라치면 꽤 오래전부터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예술음악 영역에서조차 유사한 사례가 있어 왔다. 예컨대 조지 거쉰의 재즈의 요소를 차용한 관현악곡이나 바르톡의 민속음악을 인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고전주의 시대 절대 미학을 추구하던 음악의 주체는 귀족계층이었을 터였고, 이에 대해 상반된 이념을 표방하던 낭만주의 후기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념이 전면에 부상한다. 다양한 민족의 문화적 정서를 중심으로 한 크로스오버가 일반적인 방안이었고 종래의 진부한 틀을 벗어나는 대안이었다. 

전체주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았던 인상주의 음악가들의 행태에서 예술 장르 간의 '겹쳐짐'은 현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를 두고 크로스오버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결국 단편적인 크로스오버의 사례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로스오버 현상을 1960년대 이래 상업성에 편승한 음악들의 국지적인 흐름으로 인식할 근거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낭만주의 후기 이래로 도도하고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예술 장르 간 섞임에 관한 음악 행태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상업적인 흐름에 편승한 크로스오버 현상이 대중적인 선호 대상으로 부각하는 데 단초가 되었던 음악들이 어떤 것이었나 뜯어보는 편이 오히려 유용한 접근 방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즉, 중요한 트렌드를 형성하는 동기가 되었던 음악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선 1970년대 초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가 초기 전자악기를 연주하여 제작한 『Switched on-Bach』 음반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롭게 등장한 '신시사이저'가 고전음악의 중후한 분위기를 밝고 가벼운 터치로 들려주는 유행이 1970년대 중반까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어져, 사실상 크로스오버 음악의 전범을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에냐(Enya)가 1987년 영국 BBC 방송에서 옛 켈트(Celt)인들의 생활상을 담아 방영했던 영상음악 『The Celts』와 『Watermark』의 음반이 가진 의미 역시 꼭 짚어보아야 했을 것이다. 이 음반에서 에냐는 소프라노 음역의 보컬과 전자악기의 합성음향을 잘 다듬어 수록해 세간에서 크게 각광받았고, 그런 에냐의 음악 이후 오페라 무대에서 노래하던 많은 가수들이 대중에게 다가설 음악을 노래하여 지지부진하던 음반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 좋은 예가 된다. 이것이 크로아티아 태생 피아니스트 막심(Maksim)의 '헨델'이나 '쇼팽' 변주, 혹은 크리스토퍼 오라일리(Christopher O'Riley)가 록 그룹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음악을 연주한 피아노곡으로 이어져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는 양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음악 요소 중에 악기의 변천과 채용 내용을 짚어보았어야 옳았다. 전자악기의 등장과 그 위상을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음악 현상을 거론하리라고 기대했으나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전통음악의 의미를 비껴가는 전자악기라는 새로운 도구로 인하여 파생되는 최근의 양상을 논하는 것은 당연했을 터였다. 

이방 선율이나 향기를 더하여 서로 녹아드는 퓨전화 현상을 완성하는 데에는 모름지기 전자악기가 그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악기가 근래에 연주되는 음악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굳이 대중음악이라는 영역을 벗어나는 형태에서도 독자적이고 높은 예술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섞임'의 음악 행태에 대한 발표자들의 시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서 느꼈던 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논의 주제가 되었던 크로스오버 음악 현상에 대하여 발표자들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통적인 예술음악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창작자(Composer) 혹은 이 분야의 '권위'로서의 시각과, 논의 대상이 될 새로운 음악에 대한 수용자(Audience)의 입장과의 괴리라고 해야 할지, 뭐 그런 것이었다. 이들이 과연 전통적인 관행을 벗어나는 다양한 시도나 변형 혹은 섞임이라는 양상에 대해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안목을 유지하고 있을까? 새로운 현상에 대한 현실을 별로 대수롭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고나 할까, 아무튼 수용자의 관점과의 대비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 국악의 현실과 관련한 논지에서조차 오히려 그 섞임이 대중성 확보라는 부득이한 의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다분히 미학적인 관점과 순수주의에 기울어 있는 모습이다. 무릇 '파두'나 '보사노바' 혹은 '큐반 재즈' 등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제3세계 민속음악들은 일련의 섞임에 관한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세계음악으로 거듭났을 터인데, 우리 국악의 현실은 순수함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 들어온 트로트 가락이 우리 정서와 어우러져 훌륭한 대중음악을 형성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우리가 들려줄 '월드뮤직'류의 음악은 트로트 가락이 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한 번도 섞임에 관한 경험이 없었던 국악의 한계를 이야기한다면 보다 더 개방적인 자세가 절실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과 크로스오버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바다 건너의 상황일 뿐이라는 어느 발표자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더라도, 우리 현실은 아직도 순수주의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섞임의 행태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예술적 속성을 굳이 진부하게 논하지 않더라도 보다 우월한 거듭남을 위한 과정으로 인식할 균형감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어느 발표자의 짧은 한마디, '지구촌 사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미래를 위한 변화 과정'이라는 논지가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이 섞임의 음악 크로스오버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보여주었다. 결국 아직까지 이 새로운 음악 현상은 순수주의나 예술음악에 기울어 있는 관점에서 다소 그 의미를 폄하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임을 느끼게 한다.

크로스오버, 그것은 대중예술이 열등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편향된 선입견을 잔뜩 이야기하고 있는 어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직도 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새로운 부류의 음악에 주류임을 인정하는 이름표를 달아 주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자악기를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크로스오버나 뉴에이지 음악은 전통음악의 아류쯤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의문이 앞선다. 결국 음악예술 분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의 단절이 아니라 아직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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