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4)
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3.27 09: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묘소에서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난산에서 맥동마을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하서 김인후 묘소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 안내문에는 “이 신도비는 1742년에 세운 것으로 비의 글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82년에 지은 명문장이다.

본문은 중추부사 이재가 쓰고, 전서는 대사헌 김진상이 써서 원당산 묘소 아래에 세웠다.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쓰여 있다. 2003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입구에서 2분 정도 걸어서 묘소에 올랐다. 하서 김인후의 묘는 앞부분에 있고, 뒤에는 하서 선생의 부모 묘가 있다. 하서 김인후 묘 앞에는 망주석이 좌우에 두 개 있고 그 다음에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에는 “문정공 하서 김선생지묘, 증 정경부인 여흥윤씨부좌”라고 적혀 있다.

묘비명은 김수항(1629∼1689)이 지었다. 김수항은 송시열과 함께 숙종시절 노론의 영수였다. 그는 숙종 6년(1680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시작되어 남인이 실권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김수항은 1689년에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나중에 경종)로 책봉하려는 것에 반대하다가 진도에서 사사(死賜)되었다. 제주도에서 유배중인 송시열도 서울로 올라오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런데 김수항의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이고 양할아버지는 청음 김상헌(1570∽1652)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주전론자(主戰論者)로서 중국 심양에서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절의파(節義派).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그가 남긴 시조는 너무나 비장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한편 하서 선생 무덤 앞 양쪽에 있는 돌기둥인 망주석을 바라보면서 하서 선생이 지은 시 한 수가 생각났다. 화표학(華表鶴)이란 칠언고시이다.

끝없는 벌판 갈 길 멀다

천길 화표주(華表柱), 하늘로 솟았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어디로 가는 길손일까.

표연히 날아든 하늘 신선

 

平原極望路沼沼 평원극망로소소

有柱倚空千尺高 유주의공천척고

玄裳縞衣何處客 현상호의하처객

飄然自是天仙曺 표연자시천선조

 

서글퍼 맴맴 돌아 오랫동안 머뭇머뭇

옛 성곽엔 쑥대만 욱었다네.

길다란 울음소리 하늘에 번지오.

만리를 부는 바람, 눈빛 터럭 불어가네.

徘徊怊悵久不去 배회초창구불거

向來城郭皆蓬蒿 향래성곽개봉호

長吟一聲天宇闊 장음일성천우활

萬里斜風吹雪毛 만리사풍취설모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말년 작품으로 생각되는 ‘화표학’시는 화표주(망주석)에 날아와 앉았다가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로 날아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을 노래한 자전적 시이다.

하서 김인후와의 대화체 책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를 쓴 백승종 교수는 이 시를 하서의 ‘심리적 자서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 하서는 현세나 내세에서도 학처럼 고고하게 신선으로 살고 싶었나 보다.

원래 화표학(華表鶴)은 중국 한나라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라는 선비가 신선이 되었다가 천년 만에 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았다가 시를 읊고 다시 하늘로 날라 갔다는 고사가 있는 학이다.

화표학이 되고 싶은 하서이지만 세상은 쑥대밭이고 눈물과 회한이 남아서 이 세상을 유유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병든 학 病鶴’으로 지칭하는 시도 지었다.

 

병든 학 病鶴

산언덕에서 슬피 울어도 알아줄 사람 그 누구랴

날개를 드리운 채 마른 가지에 기대었네.

하늘가를 돌아다보니 구름은 아득한데

만리를 돌아갈 생각 부질없이 지녔구려.

山畔哀鳴知者誰 산반애명지자수

還堪垂翅倚枯枝 환감수시의고지

回看天際雲猶逈 회간천제운유형

萬里歸心空自持 만리귀심공자지

 

마음은 화표학을 꿈꾸지만 현실은 병든 학이 될 수밖에 없는 하서 김인후. 그런 하서 선생을 생각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