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에게 묻다
탈북자에게 묻다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3.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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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가끔 본다. 북한의 인민들이 겪는 일상을 이모저모로 들어볼 수 있는 기회여서 관심 있게 보는 편이다. 어떤 때는 동정도 가고, 어떤 때는 안쓰럽기도 하다. 같은 민족이 갈라져서 서로 왕래도 못하고 지내다니 아무리 이념이 다르기로서니 핏줄을 억지로 막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북한 사람이라면 머리에 뿔난 사람처럼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살아온 나에게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은 아닌 말로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못사는 동포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번은 유튜브에 올라온 탈북자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떤 탈북자가 자기가 이사 다니느라 소중한 책을 잃어버렸다며 혹시 소장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락해 달라길래 마침 내 책장에 그 책이 있어 연락을 했더니 만나자고 한다. 나는 이미 읽은 책이었고, 내가 북한연구를 하는 사람도 아니어서 기꺼이 넘겨주기로 했다.

그와 만나서, 한 가지만 대답해달라, 그러면 책을 거저 넘겨주겠다고 했더니 말하라 한다. “정말 북한에서 살기 어려워 탈북한 것입니까? 북한에 2천5백만 명이나 산다고 들었는데.” 그 탈북자는 나를 보고 웃더니,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체제에서는 못삽니다.” 한다.

북한에는 한류가 휩쓸고 있는데 보다가 잡히면 뻔히 교화소나 수용소, 혹은 공개총살형을 당하는 줄을 알지만 그래도 한류열풍을 못 막는다고 한다. 밥은 굻어도 한 번 보기 시작한 한류 드라마는 안보고는 못 견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류에 한 번 빠지면 마약을 하는 사람처럼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고 한다. 정말 믿기 어려운 말이다.

나는 주위에서 누가 어떤 텔레비전 연속 드라마가 재미있다느니 하면 그렇게도 할 일이 없어 텔레비전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느냐는 투로 삐딱하게 여긴다. 그런 남한 드라마가 북한 인민을 혹하게 하다니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정신 나가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들려주는 에피소드가 나를 눈물나게 했다.

어떤 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다. 아버지, 어머니, 딸이 한류 드라마에 심취해서 매회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연속 드라마를 보기 위해 어머니는 마당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려 전기를 생산하고, 딸은 문 밖에서 단속 보위원이 오는지 망을 보고, 아버지는 방에서 아내가 생산하는 전기를 연결시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라마를 볼 정도라는 것이다. 식구가 역할을 바꾸어 그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본다는 것이다.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아주 오래 전 구소련에서 청년들이 미국 팝송 음반을 구해 경찰 몰래 듣느라 대소동을 피우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고 자유가 정말 생명을 걸 정도로 좋은가, 하고 새삼 생각했던 일이 떠오른다. 획일적인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질린 북한 동포들이 같은 ‘조선말’로 말하는 남한의 울고 웃는 드라마에 넋을 놓고 있다니, 한류가 대단하다는 느낌보다는 북한의 집단화에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자유가 곧 사람의 본질이다. 실존주의의 핵심이 자유다. 그래서 그 자유로 자아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진짜 인간이다. 이 기본 사실을 어떤 인위적인 체제로 가두고 묶어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내가 북한 통치자라면, 북한의 체제가 세상에 정말 부러움 없는 체제라면, 북한 인민들에게 한류보다 더 재미있는 ‘북류’를 만들어 보급하면 될 일이 아닌가. 북한의 ‘지상낙원’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를 만들어 남한의 한류에 대응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개혁개방과 담을 쌓고 쇄국정책을 펴는 나라에서 어떻게 남한 사람들을 열광케 할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겠는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연설이 미국정신의 기초가 되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필사적인 생존 조건이다. 북한 인민을 옭아맨 획일체제와 집단화를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북류’를 만들어낼 수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남한의 일부 사람들 중에는 ‘통일근본주의’의 헛된 생각에 빠져 자본주의든 북한 체제든 통일부터 하고 보자는 주장을 한다. 통일부터 해놓고 그 다음에 체제를 선택하자는 것이다. 과연 될 법이나 한 말인가.

나는 탈북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로 겪은 고통스런 이야기를 한낱 예능프로처럼 즐기는(?) 남한 사람들에게 화가 있지 않을까 두렵다.

조선조의 가렴주구의 양반 체제, 일제의 이민족에 의한 억압제체, 혹독한 연좌제 체벌과 상호 감시, 토대를 따지는 신분 세습이라니. 자유를 맛볼 틈도 없이 물샐 틈 없이 짜놓은 집단체제에 갇혀 지내온 북한 인민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것이다. 자유의 바람에 실어 내 눈물을 북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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