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의 주역철학⑤
왕부지의 주역철학⑤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 승인 2017.02.09 0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주역 · 계사전』에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하니 이것(도)을 이어받는 것이 선이고 이것을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爲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고 하였다. 우선 계(繼)는 ‘전하여 잇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건(乾)이 이 도를 발현하여 만물을 시작하게 한다는 뜻이다. 성(成)은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곤(坤)이 이 도를 이어받아 만물을 낳고 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우선 주자는 “도는 음에서 갖추어지고 양에서 실행된다”고 하였다. ‘계’는 펴는 것을 말하고 ‘선’은 변화시켜 기르는 공을 말하는 것이니 양의 일이다는 해석이다. 음양의 번화를 통하여 각기 다른 개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각각의 개체의 본성(本性)이 된다는 뜻이 성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석의 결과는 한 치의 어그러짐 없는 도의 운행 결과로 이어 닫음에 선(善)이라 한다는 의미인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 사계가 운행하여 도는 이치만 보자면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이 본받아야 할 하늘의 도, 즉 천도(天道)를 표본으로 하자는 뜻에서 의미가 있지 이것을 어기고자 하는 이 앞에서는 어찌할 것인가? 분명히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은 이 우주의 전체대용인 도를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한다거나, 한번 양하고 한번 음한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도의 운행방식은 간단하게 고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법칙성으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계사전』에서 “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神无方而易无體)”고 하였다. 신기하고 오묘한 변화는 무쌍하여 일정한 뱡향성과 장소를 특정하지 않으며 『역』 또한 일정한 형체와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극무변함을 이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신의 기능(神)이 ‘무방’하기 때문에 본래부터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이에 왕부지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우주의 변화는 변화무쌍하고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사람의 인식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본래 망령됨이 없는 우주를 망령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왕부지는 말한다. “세상에서 나를 굽히고 펼치는 것은 본래 억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쉽고 간단하되 지극한 덕은 진실로 사람의 일로 끼어들어 바꾸고 조정하여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왕부지는 세상에 나타나는 우주가 보여주는 현상은 본래 반은 감추고 반만 보여 준다는 생각이고, 그래서 사람이 제아무리 똑똑해도 반은 알고 반은 모른다는 주장이다. 이를 왕부지는 이렇게 표현 하였다 “나아감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그 나아감을 알뿐 그 돌아옴은 알지 못한다. 돌아옴을 정돈하면 사람들은 그 돌아옴을 알뿐 그 나아감을 알지 못한다.”(著其往 則人見其往 莫知其歸矣 飭其歸 則人見其歸 莫知其往矣)

여기서 필자가 볼 때 가장 크게 시사하는 바는 대부분의 여러 종교의 신앙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문제점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맹목적인 신앙으로 편 가르기하고 인류문명사적으로 일어났던 종교전쟁이며 문명충돌 등이 이에 해당되고 작게는 가족 구성원 속에서도 종교 갈등은 첨예하여 분란을 야기하는데서 볼 수 있다. 나아감만 알고 물러나는 지혜는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은 모순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도’라 함이 일정한 법칙성에 규정되어 있어 가지런히 배열되어 해가 지고 달이 뜨듯 확실하다면 천하의 못된 악인이 도처에 횡횡하게 되지 않겠는가? 오늘의 박근혜 ·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질 않는가? 죄의식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안하무인이요, 주어진 권력은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저지르고 나아갈 줄만 알지, 세상의 옳고 그름이며 음하고 양하는 도리는 의식 속에 전무한 정신장애아들이 아니던가?

이걸 천명(天命)을 거스르는 ‘망령됨’이라 한다. 가끔씩 종교적 맹신에서 볼 수 있는 정신분열증적 현상이다. 하늘을 섬긴다는 사천(事天)의식을 저버린 일이요,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일임에도 그걸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고통이 고스라니 온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걸 안다면 이를 천리(天理)라 하고 때에 합당하면 이를 천시(天時)라 하거늘, 이를 모르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잘잘못을 구분하지 못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이 하늘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여 행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를 왕부지는 “함부로 하늘과 같아질 수 없다(妄同於天)”고 일갈 한다. 하늘은 무한정 크고 사람은 한없이 작은 것임에도 망각하고 사는 이들이다. 큰 하늘이 펴고 움츠리거나, 넓히고 좁히는 것을 때에 따라 행하므로 이를 『역』을 통해 알고자 함이 겨우 인간임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그러니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도의 갈마듦을 어찌 범인이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盡人事待天命)”고 한 것이다. 이것이 『주역』이 알리고자 하는 이치이며, 그 천명을 알고자 학역(學易)하고 수덕(修德) 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