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보내기
하루 보내기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2.0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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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은퇴하고 나면 시끌벅적한 저자를 떠나 좀 편하고 마음 느긋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평생 풍찬노숙하고 살았으니 이제 뒷짐도 지고 이만치 떨어져서 세상을 관망하며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그렇게 살고 싶은 소망이다. 어찌 이런 생각을 나만 했으랴. 그런데 그런 생각은 공상에 지나지 않음을 곧 알게 된다.

직장 은퇴 후의 삶은 생각처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은퇴 후에도 나름대로 삶이라는 ‘싸움’이 계속된다.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직장이라고 하는 조직사회를 벗어났으니 자유롭게 살겠다고 작정하지만 세상은 그런 작은 소망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거창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사회는 내가 가만있는 것을 영 못 봐주겠다는 듯 수시로 성가시게 한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사소한 것들이다. 우편함에 날아드는 구청, 시청, 국세청에서 오는 무슨무슨 고지서들, 그리고 달마다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관리비 고지서, 가스비 청구서, 신문구독료 청구서, 무슨 신고서 등 하여튼 고지서들이 막무가내로 날아와서 귀찮게 한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숱한 고지서를 받아 납부하는 일의 끊임없는 과정으로 엮어져 있는 것 같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띵 똥’하고 현관문을 열어달라는 아파트 소독, 가스 검침, 하자 보수, 부동산 중개인…. 솔직히 이런 것들도 나는 성가시기만 하다.

그보다 더 크게 나를 불편케 하는 것은 이 나라다. 늘 시끄러워 나에게 걱정, 불안,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국가가 개인에게 주는 스트레스라는 것이 보통을 넘는다. 이제 좀 편안히 지낼까 궁리하는데 “네가 뭔데 가만있고 싶다고 그래?” 그러는 듯 나라꼴은 참 심란하게 돌아간다.

그렇다고 소부 허유처럼 어디 사람 안 사는 산 속으로 들어가 살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닌 말로 그런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외따로 떨어져 그렇게 홀로 사회를 떠나 사는 괴짜들을 본 적이 있다. 마음으로는 열 백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나를 꽁꽁 얽어맨 이 거대한 조직에 매여 일평생 살아왔는데 이제 좀 나를 놔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설령 어느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한들 거대한 그물망의 한 개 그물코 주제에 서로 다 연결되어 있으니 세상과 동떨어져서 천둥벌거숭이로 홀로 살 수는 없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 먹은 것을 어쩌겠는가.

이 한 몸 건사하는 데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혼시절 절집 선방을 흉내내고 싶어서 방의 벽을 하얀 창호지로 발랐다가 아내와 되게 다투기도 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사람은 집에서조차 제 마음대로 자유로이 살 수는 없다고.

집을 간수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쓰레기 버리는 일 같은 것이다. 쓰레기는 날마다 나온다. 만약 며칠 처리를 하지 않고 놓아두면 쓰레기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불어난다. 가장 처리 곤란한 것은 신문지다. 사나흘만 쌓아두면 한 번에 들고 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쌓인다.

집안의 다른 쓰레기들을 버릴 때는 개운한 느낌이 들지만 신문지를 내다 버릴 때는 묘한 기분이 된다. 엊그제까지도 심각하게 들여다본 기사들인데, 버리러 가는 내 마음은 갑자기 죽어버린 어항의 물고기들을 내다버리는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세상이 곧 망할 것처럼 떠들썩하게 요란을 떨던 신문 기사들이 며칠 지나서 보면 사실은 쓰레기장에 내다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었다니 참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날치 신문을 보면 크게 놀랄 일들 같지만 열흘, 보름 지나 다시 보면 신문에 난 세상 이야기들이란 게 다 지난 이야기들에 불과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신문 기사란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 들여다봐야 진짜로 세상을 알려주는 뉴스로 재탄생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지나가는 것에 목매지 말라고 신문은 전한다.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는 한편으로 건강을 위해서 부러 산보를 나가기로 한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열심히 걷는 것이 ‘건강 저축’이라 생각하며 한 30분여 집 주위 산책길을 걷는다.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뭉그적거리다가 산책길에 나서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겨울이 한창이라서 사위가 황야 같지만 먼 산봉우리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은 인생이란 고독한 수행이 아닐까 하는 깨우침을 준다. 눈 쌓인 산봉우리는 성자처럼 우러러보인다. 나도 저렇게 초연할 수는 없을까.

집이란 청소를 안 하면 금방 먼지가 쌓인다. 어디서 오는지 바닥을 닦으면 걸레가 새까맣게 묻어난다. 우주가 먼지로 구성되었다는 말은 맞는 말인 듯하다. 집이란 먼지와의 전쟁을 벌이는 싸움터다. 유난히 청결을 우선시하는 나는 거의 매일 집 청소를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이것도 일이라면 일이다. 청소를 하고 나면 허리가 지끈거린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은퇴한 사람의 하루는 하릴없이 후딱 간다.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속도를 재보고 싶다. 그런데 세월의 속도를 대체 무엇으로 잴 수 있으랴. 무엇인가를 해도, 아니 해도 하루는 손살 같이 지나간다. 그럴 바엔 기왕이면 무엇인가를 하고 하루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녁 잠자리에 들어서 하루를 되돌아보면 마음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채우려고 다시 내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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