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년 7월1일에 인종(1515∽1545)이 즉위 8개월 만에 별세하고 이복동생 명종(1534∽1567)이 11세에 즉위하였다. 명종이 어린 탓에 모후 문정왕후(1501~1565)가 수렴청청을 하였다.
문정왕후가 맨 먼저 한 일은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였다. 문정왕후는 남동생 윤원형에게 윤임 일파를 제거하라고 밀지를 내렸는데 윤원형은 그의 무리인 정순붕·이기·임백령 등과 모의하여, 형조판서 윤임·좌의정 유관·이조판서 유인숙 등을 반역음모죄로 몰아 죽이고, 나머지 윤임 일파에 호의적인 40여 명의 선비들을 주살하거나 혹은 귀양 보냈다.(명종실록 1545.8.22. 1545.9.11.)
1545년 9월16일에 부제학 임형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다툼이 있었을 때 임형수가 그의 아우에게 “만약 한 두 사람만 곤장 친다면 곧 진정시킬 수 있다”하였는데, 이는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가리킨 말이었다. 임형수의 아우가 이 말을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 퍼졌는데, 윤원형의 무리가 정권을 잡게 되자 임형수가 자기들에게 붙좇지 않고 배척한 것을 원망하여 제주목사로 좌천시킨 것이다.(명종실록 1545년 10월13일자)
이 당시에 임형수는 승하한 인종 임금의 산릉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종에 대한 만시를 쓴다.
하늘이 사문(斯文 유학자)을 없애고자 하니
신이 어찌하여 이런 때를 만났을까
오늘의 눈물을 가지고
작년의 수건을 거듭 적십니다.
평생의 뜻을 본받아 보은을 갚고자 하나
울부짖되 죽지 못한 몸입니다.
산릉의 준공을 보지 못한 채
남쪽 나라로 자리 옮김을 진실로 슬퍼합니다.
한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이었다.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1547년 9월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윤원형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1476∽1552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여기에서 여자 임금은 인종의 모후 문정왕후이다. 이 벽서를 보고 문정왕후는 크게 노했다. 관련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과 송인수, 이약빙 등을 사사(賜死)시키고,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정유침(송강 정철의 부친), 권벌 등 수십 명을 귀양 보냈다. 주1)
임형수도 양재역 벽서사건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의 상소로 사약을 받았다.
1547년 9월21일자 ‘명종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부모에게 절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해도 좋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유분록’에는 임형수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아니하자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죽지 않아,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1)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라고도 한다)은 윤원형 일파가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는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