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가 사라진 나라
사나이가 사라진 나라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12.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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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나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쓰는 듯하다. 심하게 말하면 용도 폐기된 사어나 다름없이 되었다. 예전엔 사나이라는 말은 곧 ‘의리’를 뜻했다. 사나이라는 말은 의리의 다른 표현이나 진배없었다. 어쩌다 사나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일까.

언어라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일찍 사라지고 멀리 있는 말은 오래 남는다고 한다. 예컨대 해, 달, 구름, 별 같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말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데 갓, 버선, 옷고름, 토시 같은 우리 곁에 있던 말들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생활풍습이나 문명이 바뀌면 유통되던 말들 중 상당수는 함께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말이 사라지는 것이야 우리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인간의 도리를 찬양하고 존중하는 말들이 사라저가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의리라는 말이 사라지다시피한 것은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져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나이라는 말이 사라져가면서 의리를 값지게 생각하는 사나이들도 사라져버렸다. 가만 생각해보면 의리가 통용되는 세계는 눈 씻고 찾을래도 보이지 않는다. 시쳇말로 ‘의리가 밥먹여 주냐’다. 멀리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조선시대는 사육신(死六臣), 근자에는 얼른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우리 고전에는 의리를 숭상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한데 최근의 교과서에는 그런 내용들이 쏙 빠진 모양이다. 개인주의의 세상에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삶의 방정식이고, 북한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해서인지 탈북하는 사람들에게 ‘조국을 배신했다’며 의리를 들먹인다. 참 묘한 비교라 할까.

그렇다면 의리는 정녕 필요 없게 되고 만 것일까. 의리라는 개념을 풀이하려면 다양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너와 나’ 사이의 의리를 놓고 볼 때도 찾기는 쉽지 않다. 관계 속에서 의리를 측정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사이에 돈을 놓아두면 의리의 모양이 쉽게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돈 앞에서는 친구도 사랑도 없다’라는 말이 나도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소설로 꼽히는 ‘삼국지’는 의리로 뭉친 집단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조조, 유비, 손권 모두 수하에 의리가 돈독한 무리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기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삼국지는 바로 의리를 맺은 세 사나이의 로망을 펼쳐가는 이야기다. 의리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오래도록 더욱 흥미와 감명을 주는지도 모른다.

요즘 형법은 한 친구가 죄를 저지른 다른 친구를 숨겨주면 벌을 받는다. 옛날엔 그것은 의당 친구가 해야 할 의리로 간주되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읽은 의리의 표상이 된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우정이 돈독한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큰 죄를 지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사형수의 친한 친구가 이 소문을 듣고 임금에게 자기를 대신 감옥에 가두고 대신 친구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고 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임금은 “만일 네 친구가 그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다짐을 받고 그 친구를 풀어 준다. 그런데 약속한 날, 그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 집행 시간. 감옥에 갇혀 있던 친구는 “절대로 안 돌아올 친구가 아니니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읍소해 3일만 더 기다려 주기로 했다. 마지막 그날, 기다리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고, 친구 대신 죄 없는 그의 친구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형을 집행을 하기 위해 망나니가 목을 치려는 순간 사형수 친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면서 “멈추세요!”하고 소리 질렀다. 왕은 두 친구의 우정에 감명을 받아 사형수 친구를 방면하였다는 이야기다. 길게 늘어놓은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예수도 “사람이 친구를 위해 죽으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했다. 어디 의리가 친구 사이에게만 있는 것이랴. 삶이 곧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활동이라고 볼진대 의리는 관계를 유지하는 곳곳에서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다. 이것이 삶의 절대 규칙이다. 하지만 의리는 지키기 어렵다.

이합집산하며 의리를 헌 신짝처럼 내버리는 정치판을 보노라면 우리 시대의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의리가 실종된 시대에 사라져간 의리를 생각함은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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