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25) 가보리양복점 최병국 재단사
남도의 멋을 찾아서(25) 가보리양복점 최병국 재단사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12.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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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양복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시간을 함께 입는 것
▲ 가보리 양복점 최병국 재단사

한 때는 대학입학식 선물로 양복을 맞춰 입을 때가 있었다. 마치 성인이 된 듯한 의식처럼 양복은 어른이 된 이후 한 벌씩 장만했었다. 그럴듯한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양복을 입고 면접시험을 보러갔었고 맞선을 보는 자리도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나갔다. 결혼을 앞두고는 예복으로 양복을 해 입었고 명절 때면 한복 대신 양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늠름한 개선장군처럼 보였다.

양복은 한 벌만 있어도 그 쓰임새가 다양했기에 전국의 성인 남성들이라면 한 벌씩은 있었다. 점점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이런 맞춤양복보다는 기성복에 사람이 맞춰서 입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와중에도 56년간 맞춤양복을 고집하고 있는 재단사가 있어 반세기 동안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남도의 멋은 무엇인지 들어 보았다.

맞춤옷의 생명은 경험

1960년대 양복의 수요가 늘어나 대도시는 물론 지방 읍내에까지 양복점이 생겨날 즈음 최병국 재단사도 양복업계에 뛰어들었다. “16살에 이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재봉일을 배우는데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배웠다”면서 “어느 정도 재봉일을 한다 싶으니까 재단하는 것을 가르쳐 줬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도제식 교육방법으로 하나하나 배워 갔다고 한다. “양복과 관련된 책이나 학원에서 가르치고 있긴 한데 기본적인 것들은 배울 수 있는데 세부적인 것들이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 정리하기가 힘들다”며 “기성복이야 틀에 맞춰 공장에서 찍어내면 되지만 사람 체형에 맞추려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기성복과 맞춤옷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또한 맞춤옷은 5~6년을 입어도 변형이 없다고 한다.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튼튼하다는 것이다.

70~80년대까지 양복점들은 성행했었다. 그러나가 198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들이 공장에서 기성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맞춤양복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맞춤옷의 생명은 그 사람의 체형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고객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맞춤옷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옷을 만들다보면 교과서에 나오는 교범 이외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기는데 그러한 것들은 경험을 통해서 습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른 체형을 지닌다. 양팔의 길이가 다른 사람도 있고 어깨가 좌우 대칭이 아니라 한쪽으로 약간 기운 사람도 있다. 앞가슴이 넓은 사람은 뒷 등판이 좁다. 물론 배가 나온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옷은 이러한 결점을 보완해 주는 역할도 한다.

다양한 체형이 있는데 기성복은 표준화된 체형으로 옷을 만들어 거기에 사람들이 맞춰 입게 한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넉넉하게 옷을 입다보면 맵시가 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기성복을 만드는 회사를 찾아야 한다.

옷은 편하려고 입기도 하지만 자신의 결점을 보완해 주기도 한다. 맞춤옷을 입는 이유가 바로 편안함과 맵시를 고루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1년에 5~6벌 맞춰 입는 사람도 있는데 그만큼 자신의 체형에 맞게 옷이 제작 되어 맞춤옷이 편하고 자신에게 잘 맞기 때문이다”고 최병국 재단사는 말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다.

▲ 니그랑 코트

나그랑 코트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그랑 코트’다. 최병국 재단사는 광주에서 유일하게 ‘나그랑 코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었다. 일본에서 원서를 가져와 나그랑 재단법에 대해 연구를 한 결과였다. 나그랑코트는 인위적으로 어깨를 넓어 보이게 하지 않고 본인의 어깨선을 감싸 안은 것처럼 보이게 해 요즘은 남성들보다는 여성용 코트에 인기가 더 많다. 여성들이 주로 입는 깃이 넓은 코트 등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어깨부분과 몸통부분이 다른 색으로 만든 ‘나그랑티셔츠’나 ‘나그랑점퍼’ 등도 이런 재단법으로 만든 옷들이다.

‘나그랑’이라는 말은 원어인 래글런(raglan)이 변형된 말로 일본식 발음 영향으로 보인다. 원어인 래글런은 1800년대 크림 전쟁 때 영국의 사령관이었던 래글런 백작이 부상병을 위해 고안해 낸 옷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바리코트나 더플코트 밖에 모르던 광주 멋쟁이들에게 나그랑 코트는 신혁명이었을 것이다.

양복의 유행은 4년에서 7년 주기로 돈다. 우리가 남성정장의 단추 개수로 유행을 알아본다지만 이외에도 옷 깃이 넓어지느냐 좁아지느냐, 허리선을 내세우느냐 감싸느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유행은 주기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맞춤양복을 만드는 과정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제작하는 과정은 먼저 치수를 재는 일부터 시작한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듯 취향도 다르다. 맞춤양복의 매력이 바로 손님과 대화를 통해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치수를 재면서 손님의 취향까지 반영된 맞춤양복의 방향이 설정된다면 패턴을 떠서 천 위에 그리게 된다. 그리고 가위로 재단을 한 뒤 시침 바느질을 하게 된다. 이를 가봉이라고 하는데 이 때 한번 입어보면서 최종 체형과 취향에 맞게 조정을 하게 된다.

다시 패턴을 조정하여 최종 재봉을 하게 되면 자신만의 맞춤양복이 탄생하게 된다.

“보통 맞춤양복 바지와 정장을 만드는데 이틀하고 반나절이 걸린다”면서 “이런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비록 의상학과나 기술학교에서 배워 만들기는 하지만 예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최병국 재단사는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는 봉재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양복업계에 뛰어 들었을 때 봉재를 배웠던 것도 가장 기본이되면서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교육에 대해 의상학과에서는 너무 디자인 위주로 가고 있고, 기술학교에서는 봉재를 알려 주기는 하지만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남도의 멋은

옛 도청이 있을 때에는 충장로가 패션의 거리였다. 최병국 재단사는 그 곳에서 양복점을 할 때에는 공공기관의 기관장들 옷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56년이 지난 지금 자식이나 사위를 데리고 와 맞춤양복을 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꼭 맞는 유일한 옷을 맞춰서 입기도 하지만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시간을 함께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최병국 재단사가 보여 준 남도의 멋이란 바로 옷 한 벌이 주는 정성과 시간의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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