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금호 임형수(1)
길 위의 호남선비-금호 임형수(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2.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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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豪氣)의 선비, 금호 임형수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영조 시절 호남양전사 원경하(1698~1761)는 영조에게 호남의 인물을 등용하여 달라는 상소를 한다. 상소문 일부를 읽어보자.

아! 기대승 · 김인후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 · 고경명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 · 박상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의 공적, 김덕령의 용기, 임형수 · 임제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 1747년 10월 2일)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8-1618)의 '성옹지소록'에도 호남의 인재들이 등장한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 형제, 사인(舍人) 최산두, 미암 유희춘과 유성춘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삼재(三宰) 송순, 찬성(贊成) 오겸 같은 사람은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사암 박순, 일재 이항,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림동 내동마을에 있는 등임사(登臨祠)는 호걸중의 호걸 임형수(林亨秀 1514-1547)를 모신 사당이다. 임형수는 자(字)가 사수(士遂), 호(號)는 금호(錦湖)로서 나주에서 태어났다. 1535년, 나이 2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시강원 설서,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39년에 대제학 양곡 소세양이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모실 때 그는 소세양의 종사관이 되어 함께 사신을 모셨는데, 시문에 능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임형수는 풍채가 좋고 문장도 뛰어나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여 사람들이 나라의 그릇이라 칭송하였다.

그 해 7월에 임형수는 회령판관으로 나가게 된다. 회령은 함경도 두만강 변으로서 여진족과 접하고 있는 변경이다. 당시 북쪽지방은 연이은 기근과 일부 수령들의 횡포가 커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한 인재가 필요했던 바, 중종 임금은 임형수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임형수를 회령판관으로 보내는 것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를 아끼던 소세양은 임금에게 그를 보내지 말 것을 간언하였다. 그러나 임형수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한결 같았다. “이 사람은 문무가 뛰어나니 내가 변방에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임형수가 부임지로 떠나던 날, 많은 조정 대신들이 흥인문(동대문) 밖에 나와 전송하였다. 당시 그에게 전별시를 써 준 사람은 김안국 ․ 김정국 ․ 소세양 ․ 신광한 ․ 홍섬 ․ 송순 ․ 노수신 등이다.

여기에서 면앙정 송순이 승지 때 지은 ‘회령판관으로 떠나는 임형수를 보내며’ 란 시를 음미해보자. 이 시는 ‘면앙집 1권’에 있다.

 

영웅은 옛날부터 재주 많아 근심이니

인사에 그 누가 쾌재를 부르겠는가.

특별히 명신을 보내니 그 은총이 중하고

오랫동안 모친 떠나니 그 한이 가시지 않네.

 

어제 밤 가을바람이 뜰의 나무를 흔들었는데

말 타고 내일은 노대(盧臺)로 가게 되네.

조서를 초(草)하는 데 그대 솜씨가 필요하니

조정에 응당 빨리 돌아오리라.

 

임형수는 함경도 회령에 가서 호방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는 때로는 2일 분을 한꺼번에 먹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 여러 사람의 밥을 겸하여 먹기도 하며 말하기를, ‘장수된 자는 이러한 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변경의 되놈을 어루만져 편하게 해 주어서 심복하였다. - <해동잡록>에서

이 시절에 임형수는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강계의 만포진에 있다.)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허균의 '국조시산'에 실려 있다.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 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을 건넜더니 칼과 창이 울었지.

 

변새풍(邊塞風)의 호탕한 풍격의 시이다.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임형수가 회령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중종은 매우 흡족해 하면서 그를 더욱 신임했다. 중종이 임형수의 자급을 9등급이나 높여주려 하자 사헌부가 전례가 없다며 이의를 제기했다.(중종실록 1543년 12월26일)

중종은 처음엔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2등급만 올리고 목사 ․ 부사로 제수하도록 하는 이조의 건의를 따랐다.

임형수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나중에 조정 관료들의 은근한 시기와 질투로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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