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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의 요람을 찾아서
김상집 광주전남6·10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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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1  11: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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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발통문

사발통문

누문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출발한 답사단은 먼저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을 찾았다.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져 있고, 이 모의탑에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생몰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 동학혁명모의탑

1893년 11월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명은 고부 농민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과 각각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서명한 사발통문을 작성한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는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고부농민항쟁이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철저한 혁명적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통문은 소식을 주고받는 문서인데,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이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둥글게 서명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리 리집강 좌하(各里 里執鋼 座下)

위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끓듯하였다. 매일같이 난망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어 있겠나'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차례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一.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一.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一.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이는 매우 강력한 무력봉기 계획이었는데, 이 통문에는 특별히 주목할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군수살해, 전주감영 점령과 서울 진격'이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즉 전봉준 등은 고부농민봉기 계획단계에서부터 기존의 농민봉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확대된 봉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인근 무장현 손화중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해 12월 비밀리에 무장으로 내려가 손화중을 만났으나 손화중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었다.

주산마을은 전봉준의 처가이면서 아버지 전창혁이 조병갑에게 매를 맞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쫓겨났을 때, 전봉준이 아버지를 업고 이 마을로 왔고, 마을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으며, 마을 언저리에 묻혔다는 구전이 전하기도 하는데 문득 고교시절 즐겨 암송했던 김지하 시인의 ‘황톳길’이 떠올랐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녹두장군 전봉준의 집

   

▲ 녹두장군 정봉준의 집

일행은 고부 관아터를 둘러본 뒤 녹두장군의 옛집을 찾았다. 말목장터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조소마을은 원래 담안마을이라 불렀다는데 새집처럼 오목하게 들어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집은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 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기거하였던 집이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초가집이다.

말목장터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난 군수 조병갑은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 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즉 고부의 농민 5백여 명이 1월 9일 예동 마을에 모여들었고, 10일 말목장터(감나무 아래)에서 봉기하여 농악대를 앞세우고 20리를 행진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를 헐어 버리고 탐학한 향리를 처벌한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사발통문의 3개 결의내용이 실행된 것이다.

백산기포(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안핵사 이용태의 잔학을 피해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 설득하여 드디어 3월 20일 무장현을 출발한다. 손화중의 농민군은 21일 고창현을 거쳐 22일 흥덕현의 사포와 후포, 23일 부안현 줄포를 지나 고부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부군을 점령하고 향교와 관청 등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 24일 전략지인 백산으로 진을 옮기자 태인현의 김개남도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백산에 합류하였다. 3월 25일 백산대회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 손화중을 총관령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휘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정하는 등 그 지휘체계와 조직을 세우는 한편, 격문과 4대 명의, 12개조의 기율을 잇따라 발하였다.

황토재 승리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말목장터에서 정읍으로 가는 길목에 황토재 전투를 기념하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1894년 4월 6일 농민군이 도교산(현재 하학리 도학초등학교 뒷산)에 집결하자 백산으로 출동했던 전라감영군(관군, 보부상, 유림 민병의 연합부대)이 그 뒤를 추격했는데 전라감영군을 유인한 농민군이 사시봉에 진을 치자 감영군은 황토재에 진을 치고 농민군을 과소평가한 채 바로 그날 밤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날 밤 감영군의 기습공격을 예측하여 진지를 비워 병력을 주위에 배치시키고 허수아비와 나뭇가지에 흰 옷가지를 걸쳐 위장하고 있었다. 기습공격했던 감영군은 매복했던 농민군이 삼면에서 공격해오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혼비백산하여 황토재 본진으로 도망쳤으나 승기를 잡은 농민군이 본진까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전봉준은 농민군 40여명을 보부상으로 가장시켜 관군에 잠입하여 함정으로 유인했다고 한다.

황룡촌 장태전투

황토재전투에서의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으나 이들은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는 길을 택했다. 관군을 격파한 후에도 남하한 것은 전주에 경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고 21일에는 농민군 수만 명이 장성 월평리에 도착했다.

   

▲ 황룡촌장대전투승전비

4월 23일 농민군과 경군 선발대는 장성 황룡촌에서 전투를 벌였다. 황룡촌전투는 장태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장태싸움이라고도 한다. 장태는 원래 닭을 키우는 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농민군들은 이 장태 안에다 짚을 넣어서 불을 붙여 굴려가면서 공격했다고 한다. 경군은 영광 쪽으로 길을 따라 퇴각하면서 신촌리 뒷산 까치골 능선(현재 황룡면 신호리)에서 농민군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다. 황룡촌전투에서 경군은 이학승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고, 농민군은 나라의 정예부대마저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주성 점령과 청,일의 개입

황룡촌 장태전투에서 경군마저 격파한 농민군은 빠른 걸음으로 북상하여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경악한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임명하여 병력 1,400명을 인솔하고 전주일대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긴급대신회의를 연 끝에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약 6,300여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 안타깝게도 이 청·일 군대의 조선 진주는 농민혁명, 나아가 근대 한국 및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에 커다란 굴절을 가져온다.

   

▲ 송두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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