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바우 나주 갔다 오기
멍바우 나주 갔다 오기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12.0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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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머슴에게 말했다. “자네, 내일 아침 일찍 나주 좀 갔다 오게.” 머슴은 절을 꾸벅하며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주인은 아침에 일어나 일을 시키려고 머슴을 찾았으나 머슴이 보이질 않았다. 머슴이 잠깐 바깥에 볼 일을 보러 갔다고 생각한 주인은 머슴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머슴은 해가 다 기운 저녁이 되어서야 헐레벌떡 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아니, 자네는 대체 하루 종일 어디로 사라졌다 이제야 나타나는가?” 화가 난 주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머슴이 말했다. “주인어른께서 오늘 아침 일찍 나주 갔다 오라시길래 새벽에 나주 갔다 이제 오는 길입니다.” 주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하명할 일이 있으신지요?” 주인은 할 말을 잃고 이 충직한 머슴을 나무라지도 못하고 마른기침만을 해댔다.

어릴 적 아버지는 이 일화를 곧잘 들려주셨다. 흔히 정작 할 일은 잊고 실속 없는 일만 할 때를 빗대어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런 바보 같은 머슴이라니.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어서 이 이야기를 재해석하게 되었다. 머슴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하고. 머슴을 완전 통제하는 주인에겐 잘못이 없을까.

미국에서 오래 전에 나온 책에 이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제목은 얼른 생각이 안 나는데 한 대령이 상사로부터 분쟁 지역을 갔다 오라는 명령을 듣고 갔다 오는 이야기였다. 온갖 난관을 뚫고 생사의 위기를 넘기며 대령은 목적지에 무사히 갔다 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상사가 명령하면 무엇이든 한다는 군인정신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기록한 이야기였다.

머슴더러 주인에게 무엇 때문에 나주를 갔다 오라는 것인지 묻지도 않고 다녀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느냐고 책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인 입장에서 보는 해석이다. 당연히 주인은 왜 나주를 갔다 와야 하는지 말해주었어야 한다. 무엇을 사오라고 하는지, 누구를 만나고 오라고 하는지, 구체적으로 미리 말해주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찍 나주를 갔다 오라는 명령만 내려놓고 그 명령대로 충실히 나주를 갔다 온 머슴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멍바우의 행동에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대통령을 주인으로, 청와대 수석들이나 장관들을 머슴으로 그 역할을 치환해보면 요즘 우리나라 정부의 주인과 머슴의 관계가 ‘멍바우 나주 갔다 오기’를 떠올리게 한다. 만일 머슴이 멍청해서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도 않고 무조건 나주를 갔다 오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비서가 있다면 나랏일이 어떻게 될까. 머슴이 마음에 안 든다면 머슴을 해고하고 다른 똑똑한 머슴을 들이면 된다. 아니면 충직하게 명령을 잘 따르는 점이 마음에 든다면 대통령이 법도에 맞게 구체적으로 할 일을 맡겨주면 될 일이고.

이런 일이 어찌 한 나라의 대통령과 그 수하들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명령과 복종으로 짜인 조직체계가 잘 돌아가려면 충직한 ‘멍바우’를 잘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답이다. 멍바우 역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면 이른바 ‘감’과 ‘을’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지고 역할 분담이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려면 법도가 존중되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라고 해서 묻지마 복종은 안 된다. 하물며 나랏일이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이 맡은 바 일을 잘 해낸다면 사회의 대부분의 문젯거리는 해소될 수 있다. 그가 갑이 되든 을이 되든 말이다. 멍바우 일화를 떠올린 것은 역할 분담이 흐트러져 있어 우리 사회가 지금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멍바우가 마음에 든다. 분쟁지역을 목숨을 걸고 갖다 온 대령처럼 장해 보인다. 문제는 ‘갑’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좌우간 멍바우는 단순하고 순명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설령 그가 주인에게 분부하는 목적을 묻지 않고 땀 흘리며 바보처럼 나주를 다녀왔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면 멍바우만도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 이익만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괴로움이 오고,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즐거움이 온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가 구하는 복의 실상은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 인간 본성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시끌사끌하다. 뒤돌아보면 시끄럽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오죽했으면 고 노무현 대통령은 ‘신문을 안 보면 세상이 조용하다’고 했을까. 가을빛은 더욱 짙어 산야는 아름다운데 나라는 흡사 백척간두에 선 듯 위기 속에 있다. 이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는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최근 다보스포럼을 창립했다는 한 외국 인사는 인터뷰에서 “한국은 지금 좌우로 갈라져 싸울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갈 것인가, 뒤로 갈 것인가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를 앞에 두고 어서 난국을 수습하고 앞으로 나가라는 말이다.

요즘의 멍바우라면 나주 갖다 오라는 주인이 준 미션을 받고 나서 법도에 비추어 어긋날 경우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멍바우 해먹기도 쉽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게이트는 파면 팔수록 엉망진창이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차제에 대통령이 물러나면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방안이나 대통령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함께 도모했으면 한다. 역대 대통령의 말로가 아름답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국민의 지혜를 모아서 국격을 높이는 방안도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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