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22) 조각보 명인 소쇄 이남희
남도의 멋을 찾아서(22) 조각보 명인 소쇄 이남희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11.30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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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을 모아 정(情)을 깁다
옷을 짓고 남은 천조각을 모아 조각보 만들어
▲ 소쇄 이남희 조각보 명인

어렸을 적 밥상을 정갈하게 덮고 있는 상보. 아버지의 늦은 퇴근길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 밥상을 덮고 있었던 상보는 빨갛고 파랗고 녹색이 어우러진 삼각형 모양의 조각보였다. 상보를 들추면 그 속에는 조각보만큼이나 알록달록한 반찬이 놓여져 있었다. 물론 따뜻한 밥은 아랫목 이불 속에서 나왔고, 두런두런 앉아서 맛나게 식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밥상보다는 식탁에서, 가마솥보다는 인공지능 밥솥에서, 장독 김치보다는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사준비를 하지만 아련히 떠오르는 그때 그 조각보가 생각이 나, 조각보를 만드는 명인을 찾았다.

동구 지산동에 이남희 명인의 작업실이 있다. 원래는 법학전공에 미용일을 젊었을 때 했었다. 3개의 샵과 학원을 병행하면서 취미로 바느질을 했었다. “결혼 후 태교로 뜨개질도 하면서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 기다리면서 하던 취미 생활이 본업으로 바뀌게 됐다”면서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느질을 하다보면 잡념도 없어지게 됐다”고 조각보와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조선대 디자인대학원과 전통공예문화학교를 거치면서 미용일보다는 전통 규방문화에 더 심취하게 됐다. 전국 규방문화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우기도 하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학예사들과 연구해보면서 재현하는 작업들도 무수히 했다.

이러한 이남희 명인의 노력을 인정해 사단법인 대한명인회는 2014년 조각보 분야의 명인으로 등록했다.

▲ 조각보

조각보의 역사적 가치

조각보는 말그대로 천조각을 이어 만든 보자기다. 천을 조각 내서 다시 이은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들고 남은 짜투리 공간이나 소매부분, 바지나 치맛단에서 남은 천조각들을 ‘색실첩’이라는 곳에 모아두었다가 모양을 맞춰가면서 보자기를 만들었다.

▲ 모시조각보

이남희 명인은 박물관에 있는 조각보 유물을 보고 재현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고 했다. “주로 삼베나 모시로 많이 만들어져 있는데 조상들이 입었던 의상의 주재료가 그렇기 때문인 것이고 이런 삼베나 모시는 겨울에는 끊어지기 때문에 조각들을 모아 뒀다가 겨울보다는 따뜻했던 여름에 더 많이 기웠을 것이다”라고 했다. 모아둔 조각들로 한번에 조각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만들다가 그 조각들을 한데 모아 조각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낮에는 밭일이나 농사를 짓고 가족을 보살피다 저녁에 바느질을 하다보면 하루에 조각보를 다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삼베나 모시뿐만 아니라 명주, 비단, 공단 등의 조각보도 있다. 조각보에 새겨지는 문양은 다양하지만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색깔의 조각을 붙여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고, 여러 가지 바느질 기법을 통해 무늬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감침질을 하거나 홈질, 꼬집기 기법을 통해 꽃모양이나 나뭇잎 문양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바느질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그 모양은 똑같지 않다.

▲ 조각보 배자

조각보의 크기를 보면 옷을 싼 것은 50㎝정도 되고 이불을 싼 것은 100㎝정도 된다.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그 쓰임새에 따라 조각보를 만든 것이다.

옛 아낙들은 생활속에서 재활용을 통한 편리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둥그런 모양을 하면 접어서 보관하기 힘들테고 옷이나 이불들을 접었을 때 모양이 네모이기 때문에 조각보도 네모 모양이다”면서 “전국 어디에서나 조각보를 만들어 사용했고, 귀퉁이는 묶을 수 있도록 끈을 달아메 놓았다”고 이남희 명인은 설명해 주었다.

▲ 색실누비 버선본집

조각보도 예술이다

이남희 명인도 퀼트를 접해 보았다. 퀼트는 한 번 정해진 도안데로 만들다가 틀어지면 다시 작업해야 하지만 한국의 조각보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조각보를 만들다 천조각이 맞지 않더라도 그대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고 흐틀어짐이 없이 나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이남희 명인은 퀼트와의 차이점을 말한다.

또한 일부러 큰 천에서 잘라내어 만드는 퀼트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헝겊의 크기와 색깔별로 이리저리 맞추어가면서 조각보를 만드는 일은 옛 여인들의 예술감각을 짐작케 한다. 또한 모든 옷감을 직접 짜서 가족들에게 해 입혀야 했던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알뜰함과 꼼곰함이 빛난다.

이남희 명인은 “기하학적인 모양들로 조화를 이루고 고운 색들로 밋밋함을 없앴던 규방문화의 한 분야로 자리잡은 조각보는 가족에 대한 정을 담고 있다”면서 “가족을 위해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밥을 짓고 밥상위에 놓인 따뜻한 정을 조각보로 덮어 식사를 거른 가족에게 보여주었던 정(情)의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 백조각돌띠와 타래버선

유물에서 찾는 삶의 지혜

조각보도 보자기의 일종이다. 보자기의 어원은 ‘복(福)’에서 유래했다. 복을 기원하는 염원으로 복을 싸두는 용기의 개념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보자기는 옷이나 이불 등을 싸거나 덮어둠으로써 먼지로부터 물건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보자기는 실용적이면서도 재활용할 수 있어 환경적으로 도움이 된다. 역사적인 유물로 남아 있는 조각보를 보면 빨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조각보는 옷을 짓고 남은 여분의 천조각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재사용하기 위해 모서리 부분은 명주로 덧대어 헤지지 않도록 마감질까지 했다.

이남희 명인은 “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이 큰 스승 역할을 한다”면서 “재현하면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했다.

실크나 모시에 모양이나 수를 새기다보면 옷감의 특성상 구멍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닥종이나 한지를 사이에 끼워 넣어 수를 곱게 놓았던 지혜도 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됐다.

이런 유물들 중 소박한 자수도 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 전통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자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조각보는 많은 아녀자들에게 널리 퍼져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솜씨 있는 조각보도 있고 투박한 모양의 조각보도 있지만 그 쓰임새는 똑같았다.

삼베나 모시로 홑보를 만드는 과정에는 쌈솔기법을 사용한다. 원단과 원단을 겹쳐 꼭 쌓아 놓은 방법으로 바느질을 하는 기법으로 튼튼하게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 옥사조각보

남도의 멋은

이남희 명인은 ‘손기술’도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손기술은 자꾸 연습하고 사용하다보면 늘어 날 수 있지만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가 어렵다”며 “시간을 들여 꾸준히 연습하고 연구하다보면 익숙해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명인이 생각하는 남도의 멋은 “사람 맛이 나는 정을 담아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봤다.

알뜰하게 살던 우리 어머니들이 가족들의 복을 빌며 천조각을 모아 한땀한땀 바느질을 해 조각보를 만들었듯이 이남희 명인이 만드는 조각보에도 정(情)이 듬뿍 담겨져 있었다.

▲ 옥사조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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