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11.23 0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년 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요양원의 침상에서 “진시왕도 가고, 나폴레옹도 가고, 이제 내 차례인가보다.”라는 말을 하셨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게송처럼 하신 말씀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자주 떠올린다.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가 간다. 이 한 문장은 모든 인간의 생애를 압축한다.

그가 권력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학자건 농부건 간에 모든 인간은 그 끝은 세상을 떠남으로 귀결된다. ‘삼국지’의 어떤 번역본 말미에 ‘군웅호걸들이 다투던 대륙에는 그들의 기상은 자취도 없고 오직 장강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인생을 덧없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왔다가 가는 짧고 덧없는 인생살이.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마다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드라마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볼 때면 ‘이야기 하나가 지나간다. 이야기 둘이 지나간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각자가 서울행 야간열차 칸칸이 다 채워도 남을 만큼의 이야기 보따리를 메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대부분 천신만고의 고통으로 점철된 것들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 같은 고통스런 이야기로 쓰여져 가는 행로나 다름없다.

입때껏 살아남아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통 일이 아니다. 하마터면 운명을 달리할 뻔한 일들, 그때 그 시간에 거기 없었더라면, 혹은 있었더라면 오늘의 자기가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아차 싶은 사건과 사고와 인연들로 엮어져 있다. 그렇게 보면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숭고한 것이며, 존중받아야 할 참으로 신성한 것이다. 특정한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확률은 아득히 먼 별에서 지구의 육지에 떨어진 한 조각 운석에나 비견할 만하다. 별똥별은 대부분 우주의 무한 천공으로 사라져가고 지구로 오는 것들은 대기권에서 불타 없어진다. 그러고도 살아남아 지구의 육지에 떨어질 확률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 작은 한반도에, 남쪽에, 전라도에, 광주에 살게 된 것까지를 확률로 셈한다면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런 인생을, 그냥 딱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을, 돌아가서는 천년이고, 만년이고 지난들 영 아니 오는 단 1회뿐인 인생을, 어찌 가벼이 살고 말 것인가 말이다.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대신할 수 없으며, 포기할 수 없는 지고한 무엇이다. 틱 낫한 스님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그의 삶의 시간 시간이 삶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다는, 삶의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게 허여된 이 순간순간들을 감사할 일이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 허투루 지낼 일이 아니다. 금쪽같은 시간들을 아무렇게나 보낼 수가 없다. 시간의 길이는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그 가치는 다를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하루하루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할 그런 절박한 순간들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삶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런 때는 심호흡을 하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곤 한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서다. 불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이 말을 떠올린다. 누구나 위안을 받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 분노와 실의와 좌절, 회의를 느낄 때, 막다른 골목에 쫓겨와 있는 듯한 절망감이 들 때. 그럴 때는 옛날 학교에서 읽었던 국어교과서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페이터의 산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녀자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뜯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긴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 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것이다.’

결국 삶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 마음에서 위안을 찾으라는 말이다. 이 견인주의자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의 글편들은 불경의 말을 길게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지만 삶이란 끊임없이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험한 길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마주치는 모든 물상들이 실상은 마음이 지어낸 환영 같은 것이라고 하는 선각자들의 말에서 늘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위안 없이는 도무지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다. 거기에 삶의 비밀이 있는 것만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수지맞는 일이다. 지금 세상이 금방이라도 어찌 될 것 같아보여도 지나가는 것에 동요할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삶은 너무나 짧고 또한 귀한 순간들의 연결이므로.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