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4)
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1.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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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사암 박순

박순, 두보처럼 살다

1586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박순은 경기도 영평현(永平縣),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백운계곡(白雲溪谷) 창옥병(蒼玉屛)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주1) 그는 촌부처럼,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처럼 살고 싶었다.

 

살 곳을 정하다

동쪽으로 가는 차림이 가래 삽 하나뿐이라.

소릉(두보)이 죽은 후에 사암(박순)이 또 있네.

백발을 쓸어버릴 것으로 황정(黃精)이 있으니

가을 산 푸른 산 기운 속에 캐기도 좋겠네.

박순은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를 지었다. 청령담(淸泠潭) 서쪽에 있었는데 배견와는 ‘두견에게 절을 하는 움집’이란 뜻이다.

언덕 높은 곳에는 이양정(二養亭)도 지었다. 정자 이름은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二養)’는 송나라의 도학자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뜻을 취하였다.

박순은 창옥병 앞의 아름다운 청령담에 있는 여러 바위와 벼랑에 이름을 붙이고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를 받아 일일이 새겼다. 청학대(靑鶴臺)ㆍ백학대(白鶴臺)ㆍ산금대(散衿臺)ㆍ수경대(水鏡臺)ㆍ토운상(吐雲床)ㆍ와존(窪尊)등이 그렇다.

박순은 이양정기(二養亭記)와 배견와, 창옥병 등에 관한 시를 지었다.

이양정 벽에 쓰다 題二養亭壁

골짜기에 새소리만 때때로 들려오고

쓸쓸한 침상에는 책 여러 권이 흩어져 있네.

언제나 백학대 앞의 물이

산문(山門) 앞을 나가자마자 흙탕물에 섞여 한스러워라.

 

배견와 (拜鵑窩)

배견와 안의 두견을 존경하여 절하는 늙은이

밤마다 창문에 기대어 듣는 재주 좋구나.

노쇠와 질병의 두 가지가 내 몸을 재촉하니

천 줄기의 눈물을 백화 속에 뿌려본다.

 

창옥병 (蒼玉屛)

상제가 곤륜산의 천 길 석골(石骨) 오려내어

온갖 신령이 분주하게 새기고 깎는 수고를 했네.

높고 험하게 거꾸로 꽂혀있는 바다거북의 굴을

사암(박순의 호)으로 하여금 세상에 나와 보게 하였구나.

박순의 시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시중유화(詩中有畵)이다. 시 속에 정경(情景)이 다 보인다.

한편 박순은 두보처럼 살았다. 시사(時事)를 논하는 일이 없었고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촌부처럼 살았다.

 

두자미가 일찍이 무협(巫峽)의 일을 시로 썼는데

내가 지금 이곳에 오니 그와 같아졌네.

산울타리 세운 곳에선 힘들여서 호랑이를 막고

벼랑에서 석청 꿀을 거두려면 멀리서 벌이 날아가길 기다리네.

 

사암이 지은 ‘봄날의 흥겨움 春日漫興’ 시에도 두보가 나온다.

 

두보는 술을 즐겼지만 돈이 한 푼도 없어

집안 식구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술 취해 잠자는 셈 쳤네.

나는 아직도 내려주시는 녹봉 받을 수 있으니

어찌 봄이 가는 데 술 깬 축에 끼어 있으랴.

 

수없이 많은 복사꽃이 가는 곳 마다 만발해

사람마다 술에 취해 봄바람에 답하네.

나는 이제 늙고 게을러 잠자고 싶은 생각뿐이라.

짙붉은 꽃이 연붉은 꽃에 비춰도 내버려두네.

 

죽곡 이장영이 찾아오다

이렇게 살았지만 박순은 외로웠다. 정승을 내리 14년간이나 하였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세상인심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영광(지금의 장성)출신 죽곡 이장영(1522~?)이 찾아왔다.

주2) 이장영은 1586년에 선공감정(繕工監正)이었는데 이 무렵에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박순을 찾아 온 것이다. 박순은 기뻤다. 그런 기쁨을 적은 시가 남아 있다.

 

이장영이 경차관으로 찾아오다.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훌륭한 말 타고 골짜기에 찾아오리라고.

산새들을 화려한 비녀로 놀라게 만들었네.

그윽한 거처에 일이 없어 사람도 찾아오지 않기에

문 앞을 쓸지 않아 낙엽이 수북하였네.

▲ 경기도 포천시 옥병서원

 

주1) 경기도 영평현(永平縣)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 일동면 ․ 이동면 일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에 나와 있다.)

주2) 죽곡 (竹谷) 이장영(李長榮 1522∽?)은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장흥 ․ 함양 ․ 광주 ․ 성주의 수령을 하였다.

이장영은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강사에 지지당 송흠(宋欽 1459∽1547)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지금은 수강사는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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