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19) 영산 대목장 박영곤
남도의 멋을 찾아서(19) 영산 대목장 박영곤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11.10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을 담아 인간에게 안기다’
한국 건축물에 실용성과 공간 활용의 백미
▲ 영산 박영곤 대목장은 2010년 광주무형문화재 제19호 기능보유자로 선정됐다.

‘집에 하나도 없던 가구며 장롱도 만들 수 있는 일’이라는 외삼촌의 말에 목수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은 등넘어 배우고 혼자서 끊임없는 실습과정 끝에 9년만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5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손을 거쳐간 ‘집’만해도 수십채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영산 박영곤(63) 대목장의 이야기다.

광주 전남 유일의 대목장이 되기까지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전남 순천시 송광면 낙수리 송광사 아랫마을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여동생과 어머니를 어떻게 해서든 봉양 해야 할 가장이었다. 도시였다면 신문도 배달하고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겠지만 시골이라 할 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처지가 박영곤 대목장으로 성장하게 된 기회였는지 모른다.

▲ 해인사 백련암 정념당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외삼촌이 목수일을 하는 분에게 저를 소개시켜 주셨지요. 집에 가구라고는 밥상 밖에 없던 시절에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거죠.” 이때 나이가 15살이었다. 세상물정 모른 어린 소년에게 선생님은 ‘어깨 너머로 눈치로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열심히 잔심부름하면서 연장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고 문양을 그린 설계도면을 필사해 틈나는대로 깍아보기도 하고 다듬어 보기도 했다.

“한번은 선생님께 ‘한번 더 가르쳐 달라’라는 말을 했다가 혼줄이 났다”면서 “그 뒤로는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고 주의깊게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배우러 온 제자의 능력을 답답해 했던 말일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만두고 나왔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훈계도 교훈으로 삼다보니 점점 일들이 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옛 도제식 교육방법은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보고 익히는 방법이라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그 분야에서 다뤄보지 못한 부분이 많아 전문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9년만에 도편수로 독립

▲ 해인사 백련암 좌선실은 생전에 성철스님이 참선하던 곳이기도 했다.

스승이었던 임채점 선생에게 배운 것은 나무를 다루는 일만은 아니었다. 증심사 대웅전과 덕림사 법당 공사를 하면서 인연이 된 한국 건축물은 송광사, 대흥사,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짓거나 개보수하는 전문가로서 나서게 했다.

9년만에 도편수로 독립하여 맡은 일은 해남대흥사 안내소(토산품 가게)였고 다음으로 향림선원 법당이었다. 스물넷의 젊은 도편수는 나이 많은 목수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도편수로서 첫 집을 완성하고 일꾼 품삯 주고 남은 돈은 없었지만 자신감을 얻게 됐다. 대흥사 토산품가게는 다 지었다가 신도회장의 반대로 옮기기까지 했다.

“차츰 일이 숙달되다 보니 한 채를 짓고 나면 아쉬운 점을 다른 집 지을 때 보완하는 식으로 짓게 된다”면서 “그러다보니 같은 건축물이지만 약간씩 틀리게 된다”고 했다.

   
▲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은 성철스님을 모신 법당이다.
   
▲ 해인사 원당암 염화실은 혜암스님이 거처하던 곳이다.

박영곤 대목장에게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 있다. 다락이다. 서른 살이 돼서 해인사 삼선암을 지으면서 다락을 처음 지었다. 터에 비해 수납공간이 적은 한옥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한 연구의 결과였다. 축소 모형을 지어보고 갖가지 실험 끝에 다락을 올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어 해인사 비구니 선방 네 군데에 다락을 올렸고, 한옥의 수납공간을 두 배로 늘리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 건축물의 독창적인 양식을 선보였다. 다락이라고 해서 좁은 공간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서서 걸어다닐 정도로 높다. 그리고 창문을 내어 빛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도록 해 햇볕의 따스함이 목조의 아늑함을 더하도록 건축했다.

▲ 해인사 원당암은 신도들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형제작에서 설계까지

집에 대한 박영곤 대목장의 생각을 들어봤다. “집을 지을 때 실용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게 되는데 요즘은 의장적인 면도 관심을 갖는다”면서 건축물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설명해 주었다. “첫째로 구조적으로 견고하고 튼튼해야하겠고, 둘째로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이어야 할 것이며, 셋째로 보기에 아름다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비용 측면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견해를 말했다.

집 한 채를 짓는데 적게는 수천재(數千才)에서 많게는 수십만(十萬) 사이(才)의 목재가 들어간다고 한다. 1사이(才)라 함은 가로, 세로 단면이 각각 1치(3㎝)이고, 길이가 12자인 목재를 기준으로 한다. 목수 5명이 한달에 1만사이를 사용한다고 하니 집 한 채를 지을려면 목수가 몇 년 동안 일을 하기도 한다.

▲ 해인사 삼선암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깎고 구멍을 내서 끼우는 작업을 한다. 요즘은 공장에서 치목(治木)을 해 현지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시간을 단축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도면 그리는 연습을 공사현장에서 도면을 빌려와 얇은 종이를 유리에 올려놓고 밑에서 전등불빛을 비춰 복사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설계를 해서 시연까지 하다보니 오류를 미연해 찾아 낼수 있다”고 했다. 나무를 사용하다보니 대충 작업을 하다 틀리기라도 하면 나무를 다시 베어와야 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 미암일기 유물전시관도 박영곤 대목장이 지었다.

16살 때 도림사 법당 보수하는데 10리 떨어진 길상암 암좌 근처의 나무를 베어오게 됐다. 나무에 수분이 빠졌을 시기인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작업을 하는데 그 큰 나무를 베어 산에서 내려오는데 마을 사람들 울력으로 몇십명이 끌고 오는 일은 집을 짓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모형을 만들어 사전에 오류를 찾아내는 일을 중요시 한다. 특히 옛 건축물의 실제 모형을 만들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술도 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모형을 통해 화암사 극란전에 남아 있는 ‘하앙식 기법’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일반적인 처마 구조보다 훨씬 더 길게 처마가 나오게 하는 기법인데 백제시대의 건축물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남도의 멋은?

▲ 미암일기 관리사무소이다.

박영곤 대목장에게 아들이 있지만 목수 일에는 전혀 재능이 안보여 다른 일을 찾고 있다. 그래도 자신은 초등학교때 그림을 그리는데 소질이 있어 목수하면서 설계도라도 그렸는데 아들은 전혀 아니라고 봤다. 지금 고려대학교 생명공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중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은 곡선미가 있어 지붕의 처마를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박영곤 대목장은 “곡선의 아름다움 속에 남도의 멋이라고 할 수 있는 실용성과 공간활용, 건축물로서의 견고함이 곁들여 자연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식주에서 포근한 안식처를 줄 수 있는 집의 가치가 더욱 실감나는 대목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