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날아온 문자
새벽에 날아온 문자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10.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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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는 문자와 소리와 영상들이 날아다닌다. 그것들은 온 천지를 공기처럼 날아다닌다. 수신기만 있으면 산에서나 들에서나 어디서나 그것들을 듣고 볼 수가 있다. 참 신기한 세상이다. 그 문자와 소리와 영상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런 것들이 혹여 먼 외계에서도 지구로 날아오지 않을까 하여 커다란 전파안테나를 세워놓고 밤을 새워 귀를 쫑긋하고 있다.

직장에 다닐 때 어쩌다 무슨 일로 늦게 회사에 들어갈 때면 나는 이렇게 나를 변명했다. “오다가 소피 마르소,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릴린 몬로… 수많은 여배우들이 나를 못가게 길을 막아 늦어졌다.”고. 그럴 것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는 그런 배우들이 수도 없이 길거리에 돌아다닌다. 영상들이 밤낮없이 공중을 돌아다니는 것을 빗대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전파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그 문자와 소리와 영상들은 죄다 인간들이 또 다른 인간들을 향하여 발신한 것들이다. 그 중에는 뉴스, 영화, 편지, 암호 등 별의별 전달물들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범죄와 유혹과 음모 같은 실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많다.

휴대폰은 이런 공중 부유물 메시지를 수신하는 최신 주요 기기다. 이제 단순히 전화라기에는 만물 수·발신 박스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전달물을 디지털화해서 날려 보내는 기본 요소는 영(0)과 일(1)이다. 영과 일을 배열 조합해서 모든 문자와 소리와 영상을 만들어 전파를 통해 날려 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영과 일에는 어둠과 빛이 있다. 영과 일이 만들어내는 가상 세계는 이제 실제 세계와 섞여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인지 모를 정도로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가상 세계의 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영과 일이 만들어내는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를 압도해서 우리는 가상 세계의 일에 현실 세계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되어버렸다.

내 휴대폰은 어찌 된 셈인지(아마도 폴더폰이어서인지 모르지만) 누가 내게 문자를 보내면 어떤 때는 이틀이 지나서야 올 때도 있다. 공중에 날아오다가 문자가 엉뚱한 데로 헤매다 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일도 있고, 모임에 못 나가서 실례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음성으로 하는 것은 너무 요금이 비싸서 다들 문자로 소식을 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설령 제 시간에 도착했다고 해도 늘 무음 상태로 해놓다 보니 못 보고 시간을 넘길 때도 많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으로 날아오는 문자들은 때로 오해를 하게 될 때도 더러 있다. 단순한 소식이 아닌 감정을 전하는 메시지일 경우 더욱 그렇다. 문자라는 것은 본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억양도, 강조도, 음색도 없으니 발신자의 뜻과 다르게 받아들여 갈등을 유발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게 문자를 보낸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로 보내놓고 그 다른 사람이 악플 같은 문자를 되보내자 내가 보낸 것으로 오해하고 그 일로 네가 보냈느니, 안했느니 하는 시비가 벌어진 일도 있었다. 나중에 애초에 보낸 전화번호를 확인해보라고 전해 오해가 풀리기는 했지만.

이런 불편과 오해와 시간 절약을 위해서 미국에서는 문자 메시지를 단순히 예(Yes)와 아니오(No)로만 하도록 한 플랫폼이 생겨나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내가 상대에게 예,라고 문자를 보내면 상대와 내가 최근 주고받는 이슈를 함축해서 잘 돼가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기다려랴, 쯤 되고, 어떤 아는 사람이 아니오,라고 답이 오면 요즘 당신과 내가 거론했던 일들이 잘 안 풀리고 있으니 오해 없으면 좋겠다, 쯤으로 이해하는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황당한 문자 송수신 방법 같지만 곰곰 헤아려보면 모든 문자 메시지는 나와 상대 사이에 결론이 예, 아니면 아니오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중간의 자초지종을 생략하고 예, 아니오로 상태를 전해도 서로 이해가 된다면 그보다 더 깔끔하고 편한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옛날 신라 시대 어떤 사이좋은 두 친구는 자기 집 마당의 오동나무 잎새가 흔들리면 웃동네 친구가 술 마시러 오라는구나, 하는 기별로 알아듣고 술 마시러 친구집에 놀러갔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요즘같이 디지털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렇게 간편히 의사를 전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사회공동체의 공감 능력이 커져야 할 것이다. 남의 일에 같이 울고 같이 우는. 우리는 지금 디지털 미디어 홍수 속에 살고 있는데, 그 편리도 크지만 그만큼 폐해도 크다.

모든 것을 일일이 문자로 전하고 받고 하는 형태는 깊숙이 들여다보면 서로서로 공감대를 갖지 못해서 생겨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SNS에 함부로 올려놓는 말풍선들을 보라. 그것 때문에 서로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라. 모모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올린 SNS 말풍선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낙으로 삼고 되나캐나 사실 확인도 없이 마구 날려 보낸다.

휴대폰은 이제 사람 몸의 5장6부에 붙은 5장7부가 되었다. 인체의 외장 장기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문자로 오해를 보내지 않고 또 오해하지 않는다면 사람 몸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 같다. 신새벽 휴대폰으로 문자들이 도착하고 있다. 모두 어제 보낸 쓸데없는 문자들이다. 날짜가 지난 문자들이 죽은 벌레처럼 휴대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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