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07주년
안중근 의거 107주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0.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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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월26일은 안중근 의거 107주년이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처단했다.

오전 9시 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멈췄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안중근은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3발을 쏘았다.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안중근은 저격 후 당황한 빛 없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어) 삼창을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 내 객실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15분 만에 죽었다.(일본 검찰조서의 기록)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고, 밤 8-9시경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11월3일에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이감되었고, 2월14일에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3월26일에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나이 31세였다.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토 암살사건’이라 칭하고 안중근을 흉한(兇漢 : 테러리스트)으로 몰았다. 

▲사진 1

주1) 일본은 뤼순감옥에서 찍은 단지(斷指) 손이 잘 보이도록 가슴 가까이 얹은 초췌한 모습의 안중근 사진을 우편엽서로 제작하면서, 하단에 “이토공을 암살한 안중근” 제하에 “한인(韓人)은 고래(古來)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 무명지를 절단하는 구관(舊慣)이 있다.”라는 저주의 문구를 적어 판매하였다. (사진 1) 안중근을 파렴치범으로 몰기 위한 술책이었다.

주2) 한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했다. 양계초는 ‘가을바람이 부니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네.(秋風斷藤曲)’란 시를 지어 안중근 의거를 찬양했다.

손문도 안중근을 추앙하는 시를 썼다.

공은 삼한을 덮고 아름은 만국을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니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토도 죄인이라.

또한 훗날 중국 총리 주은래는 이 사건을 두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인민의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3. 2104년 1월19일 중국 하얼빈 역 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다음날인 20일 오전에 일본 정부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에 유감을 표시하며, "안중근은 일본 초대 총리 이토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 "라고 주장했다.

▲사진 2

한편 일본은 1980년 대 이후 안중근에 대한 소설이나 전기가 많이 간행되어 안중근을 독립운동가, 평화운동가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도쿄 품천구 교육위원회가 1996년에 제작한 이토 히로부미 묘소의 안내판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의해 저격당해 69세로 숨졌다.’고 적혀 있다.(사진 2)

그런데 한국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일컫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3) 소위 뉴 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이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1982년에 발간된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의 저서 '비극의 군인들-일본육사출신의 역사'가 친일파를 옹호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박경미 더불어 민주당 의원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고 표현한 것을 문제 삼았다. '처단'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역사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폄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주1) 안중근은 1909년 10월30일에 일본 검찰관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자, 당당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등 15가지 이유를 댔다. 1910년 2월12일 법정에서 그는 '이토를 개인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행한 것이다. 나는 전쟁 포로이니 국제공법에 의해 처리하라‘고 최후 진술했다.

주2) 민속학자들은 한국의 민속에는 남을 죽이는 데 맹약으로 단지하는 풍속은 찾을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윤병석 저, 안중근 연구, 국학 자료원, 2011, p 65)

▲사진 3

한편 천황제를 반대한 혁명가 일본인 도도쿠 辛德秋水는 이 사진의 위쪽 공란에 “사생취의 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 살신성인 殺身成仁 (목숨을 버려 인을 이룬다) 안군일거 安君一擧(안군이 의거를 하여) 천지개진 天地皆振 (천지에 두루 떨치네)”이란 찬사(讚辭)를 적어서 그가 대역무도죄인으로 사형당할 때까지 간직하였다. (사진 3)

주3) 구태훈, 구태훈 교수의 안중근 인터뷰, 재팬리서치, 2009, p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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