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가 만난 사람-가수 김원중
시소가 만난 사람-가수 김원중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10.19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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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에서 30년 동안 꿋꿋이 소통하는 가수
"주변의 역사와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 가수 김원중

나라가 돌아가는 꼴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 요즘이다. 세월호, 백남기 농민, 5.18 폄훼, 국정교과서, 위안부, 사드배치, 남북대립 등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진실이 밝혀진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바로 잡혀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런 시대에 권력의 벽앞에 좌절하고 쓰러질 법도 하건만 꿋꿋하게 광주다운 삶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만나 보았다. 이번 <시소가 만난 사람>은 30년 외길 평화와 통일, 공동체의 가치를 노래를 통해 전하고 있는 가수 김원중이다.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는 우리나라가 잘 살지 못했어요. 레코드를 틀 수 있는 전축을 가진 곳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죠. 사람들은 음악이란 것을 잘 몰랐어요. 부르는 것도 잘 못하고요. 요즘은 노래를 들을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기회가 많죠.

저는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소년이었어요. 살면서 노래 한 번 안 해본 사람들이 수두룩한 시절에 기타를 치고 노래를 좀 했다 하면, 상대적으로 특별한 재능인인 것처럼 대우가 컸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가 되게 잘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거죠. 노래를 시키면 빼지 않고 자신감 있게 불렀었죠. 이러한 것들이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네요.

지역에서 나온 첫 음반, ‘바위섬’으로 히트까지, 그 과정과 계기가 궁금하다.

- 대학에 와선 수업도 안 듣고 캠퍼스 잔디밭에서 노래만 불렀어요. 재밌었죠. 그렇다고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이렇게 2학년까지 노래만 부르며 놀았더니 학점이 엉망이 된 거죠. 제게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공부 좀 해야지”라는 말씀이 무겁게 다가왔어요. 마음을 다잡으려 군대에 다녀왔죠.

제대하고 고시공부를 시작을 했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사직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했어요. 지금 사직공원 밑에는 공연을 할 수 있는 여러 가게들이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크라운 광장’이라는 한 가게밖에 없었거든요. 그 당시 유행하던 생맥주집이죠.

공간도 좁고 기타만 덜렁 놔둔 곳이었어요. 아베크족, 즉 젊은 남녀들이 분위기 좋은 사직공원에서 데이트를 한 후 가게에 들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듣고 가는 곳이었죠.

그런데 그 가게의 묘한 점은 광주의 노래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는 거예요. 음악 하는 사람들 간에 정이 생기며 교류가 오갈 수 있었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왜 음반은 서울에서 만들어야 되지? 광주에서 만들면 안 되나?”는 등,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이야기는 서울이 아니면 불가능한 얘기거든요. 그 당시 지방에서 가수한다고 집문서나 부모님의 소 판 돈을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들이 많았었죠.

광주사람들은 서울에서 만들어진 ‘광화문’이란 노래보다 ‘광주천’, ‘충장로’라는 노래에 더 느낌이 오겠죠. 이런 게 향토색이에요.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공급되는 노래만 들으면 지역은 없는 거죠 노래 속에.

“왜 서울에서 만들어진 노래를 들어야해? 우리 지역에서 만들어진 노래를 만들 수 있잖아” 등, 이미 80년대 광주의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인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하여 광주에서 음반을 만들기로 했죠.

작사, 작곡, 앨범아트 등 모두 우리 손으로 해냈어요. 이런 취지에 동감한 서울사람들이 도움도 줘 많은 비용이 절감됐죠. 그렇게 만들어진 음반이 ‘예향의 젊은 선율’이에요.

이 음반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해요. 대한민국 가요계에 최초로 지역사람들이 쓴 곡들로 기획, 제작을 한 음반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히트곡인 ‘바위섬’까지 나왔죠.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이 음반에 참여함으로써 노래 잘하던 아마추어가 가수가 된 거예요. 이게 제가 가수가 된 계기죠. 그냥 고시공부하며 빈 시간동안 노래하고 즐기던 사람이 그때 당시에 자신의 음반이 생기고 히트까지 치게 됐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인가요. 로또 맞은 것보다 더 환상적인 대박이 터진 거죠 저한테.

서울에서 활동하다 광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는?

- 2년간 TV에 제일 많은 출연을 했었죠. 제게 투자하여 돈을 버려는 상업적인 매니저들도 붙었고요.

당시 가수들이 돈을 크게 벌 수 있던 것은 밤업소에 출연하는 거예요. 가수가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들을 준비해서 보여주는 콘서트와는 확연히 다르죠. 손님들이 원하는 곡과 분위기에 걸맞은 신나는 곡을 불렀어야 했어요. 저와는 맞지 않았죠.

제게 노래란 공부하다 쉴 때 하던 유희였고, 또 그 당시 노래에 목숨을 걸던 때가 아니었어요.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었죠. 광주에서도 다른 지방으로 공연갈 수가 있으니 광주로 내려오게 됐어요.

‘바위섬’, ‘직녀에게’ 등 의식이 있는 노래를 부르게 된 이유는?

- 음악적 언어, 정체성, 색깔 등 저는 가장 광주적인 것을 제일 잘 아는 거예요. 노래는 말로 하는 거잖아요. 말에다가 멜로디를 얹혀서 하는 것을 노래라고 하죠.

경상도와 광주 출신들의 노래를 잘 들어보면 약간의 차이들이 있어요. 하지만 서울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 향토색들이 다 지워지게 되죠.

‘바위섬’, ‘직녀에게’ 등 의식이 있는 노래를 부르게 된 이유는 그냥 제가 광주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80년대 대학을 다녔어요. 실제로 학교를 못 가게 가로막는 총을 든 공수부대를 봤죠.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긴 그들과 죽어나간 셀 수 없는 사람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군사정권이 또 들어섰죠. 집단적·국가적 트라우마가 여기서 발전을 한 거예요.

저는 운동권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본거죠. 국가에서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그냥 다 덮어버리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거예요. 현재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다들 모른 척.

제 주변의 역사와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게 한 거죠. 깊숙이 가라앉았던 이 울분이 터져 가수는 노래로, 화가는 그림으로 등등, 토해내는 거예요.

팬들과 시민들이 주최한 30주년 기념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 제가 공연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주위 후배와 사람들이 “요새 광주가 많이 힘이 없는 것 같은데 선배님을 통해서 광주로 한 번 모여 봅시다”라며 “한 지역에서 전국을 향해 30여 년간 지역 얘기를 끊임없이 하는 가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가수가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공연안을 만들어 서로를 돌아보고 하는 것도 멋지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이런 경우도 우리나라에 유래가 없어요. 광주니까 가능한 거죠. 멋지지 않나요? 한 예인의 삶에 대해 시민들이 존중해주고 인정해주고 자리를 성대하게 만들어주니... 좀 쑥스럽죠. 앞으로 더욱 잘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기네요.

빵 만드는 공연 ‘김원중의 달거리’를 시작한지 11년이 지났다. 언제까지 이어나갈 것인가.

- 북한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국가 뿐 만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가 전쟁을 막기 위한 방법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2005년에 평양에 빵 공장을 지었어요. 거기서 하루에 만개의 빵을 만든다고 해봐요. 하루에 만 명의 북한 어린이들이 빵을 먹고 자란다는 거죠. 11년이 지났어요. 2005년부터 먹던 10대 아이들은 20대가 되었겠죠. 이 아이들이 남쪽에 대해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을까요? 싸울 대상이 아닌 것 같다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겠죠.

미국이 전쟁을 하려고 해도 남과 북이 “우리 싸우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미국이 혼자 전쟁을 하려 할까요. 미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때이기에 저는 달거리 공연을 계속 이어나갈 겁니다.

인생을 되돌아본다면 아쉽거나 후회되는 일은 없었는지.

- 좀 더 활동하여 유명한 가수가 됐었다면 거리에서 노래할 때, 여러 일들을 주장할 때, 많이 알려진 사람이 얘기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주기 때문에 후회까진 아니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꼭 결혼하고자 했던 분과 결혼하지 못한 것도 후회되네요.(웃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 섬나라가 아닌 경우 외국 사람들은 이웃나라로 자신의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걷기 등 우리나라처럼 비행기나 배가 아닌 것들로 이동할 수 있죠. 우리는 섬도 아닌데 섬처럼 살고 있어요. 이 얼마나 웃긴 광경인가요.

경부 고속도로를 타면 아시아 하이웨이라며 밑에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가 적힌 표지판을 볼 수 있어요. 이미 연결된 길은 놓여 있지만 고작 10m의 철조망을 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되진 못하고 있죠.

제 꿈은 아시아문화전당 앞에 그 길을 횡단하는 지도가 크게 그려진 컨테이너 트럭을 세우는 거예요. 문을 열면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되는 거죠. 성금도 모으고 오월정신을 이 트럭에 싣기 위해 매주 공연을 해요. 그러다 보면 많은 시민들이 지도를 보고, 노래를 들으며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이 트럭이 한 대가 아닌 수 십 수백 대가 될 수 있겠죠.

북한-중국-인도-터키를 트럭으로 횡단하며 저녁이 되면 정차된 나라의 사람들과 어울려 공연도 하고, 이 신기한 광경에 중계도 붙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이 또한 전쟁을 막는 것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죠. 저의 꿈이 광주에서 출발했으면 해요. 광주가 한반도, 그리고 세계의 희망이 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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