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20)-체암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20)-체암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10.04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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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암 나대용 장군의 호를 따 명명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 대승을 거두는데 결정적 역할

나대용 장군의 얼이 깃든 체암로

▲ 거북선이 업고 있는 나대용장군의 가적비

체암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나대용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체암(遞菴)을 사용하여 명명된 길이다. 그가 나고 자랐던 고향인 나주 문평면부터 광주 광산구 양동까지 무려 18618m로 앞서 보도했던 길들에 비해 훨씬 긴 길이다.

공기에서부터 맑은 기운은 도시를 벗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벼가 고개 숙이며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체암로는 옛 고막원역 앞 삼거리에서 시작됐다.

닳고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가게들과 구멍가게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시골 고향집을 떠오르게 한다. 논밭들을 지나 길 바로 오른편 위에 있던 나대용 장군 의가적비를 만나볼 수 있었다. 거북선이 가적비를 등에 태운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이순신 장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오륜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나대용장군의 생가

가적비를 지나 오륜마을로 들어갔다. 이 마을 안에는 나대용 장군이 살아생전 지냈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도착한 생가에는 심어져 있던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뒷면은 죽림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붕은 홑처마를 사용한 초가건물이었다. 묘소는 마을에서 3km 떨어진 문평면 대도리 산기슭에 있다고 한다.

마을 경로당 앞 정자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은 체암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조상들이 나대용 장군과 이웃이었고, 친구들이었을 터이다.

▲ 나대용장군만을 기리는 사당인 소충사(昭忠祠)
▲ 소충사 앞에는 나대용장군의 황금동상과 거북선동상이 오륜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생가 인근인 마을의 깊은 자리에는 나대용 장군만을 기리는 사당인 소충사(昭忠祠)가 세워져 있었다. 소충사 입구 앞에는 나대용 장군의 커다란 황금빛 동상과 거북선이 오륜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주변은 물이 고이게 하여 수군을 연상시켰다. 동상 뒤에는 그의 역사가 석판에 새겨져 있었다.

소충사 뿐 아니라 금성나씨 문중에서 고려시대의 문신 송와 나문규(羅文圭:1312∼1355)와 죽헌 나계종(羅繼從:1339∼1415)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봉강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94호)가 마을 뒷 출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금성나씨 종친회를 개최하는 등 마을의 정자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나대용 장군이 나고 자랐던 오륜마을은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리를 지키며 그를 기리고 있었다.

작은 마을마다 정류장이 있어 농어촌 버스인 500번과 501번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이 길 주변에 사는 마을사람들의 이동수단이다.

▲ 명하마을의 쪽 축제

명하마을을 지나는데 다른 마을과 달리 차들이 북적거린다. 매년마다 열린다는 명하쪽빛마을의 쪽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올해 제 5회를 맞이하는 쪽 축제는 직접 천연염색 체험도 해보고 염색장 제 115호윤병운(인간문화재)이 살았던 집에 전시된 역사와 천연염색제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쪽 축제에서만이 아니라 염색체험은 체험예약을 통해 할 수 있으니 명하쪽빛마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파괴되고 있는 농촌, 도시만의 문제가 아냐

사방이 논과 밭인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나주를 지나던 길이 함평을 지나고 있었다. 석지마을을 지나는 길은 양계장 설치를 반대한다는 현수막과 빨간 깃발들이 보인다. 양계장을 설치하면 악취와 환경파괴 수질오염 등 청정구역이었던 마을이 피해를 입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길과 다름없는 체암로에는 10톤 이상의 화물트럭들도 많이 다니고 있었다. 공장들이 드문드문 농촌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차선의 좁은 길을 느린 화물차들이 막으니 모든 차들이 중앙선을 침범하여 화물차 앞으로 추월해 나갔다. 시골길이라도 추월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길이었다.

레미콘공장 걸립을 결사반대한다는 깃발들도 보인다. 시멘트가루가 차도를 뒤덮을 것이며 사람의 호흡기에도 문제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생태계 파괴는 도시만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농촌의 자연환경도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다.

▲ 삼거동고인돌

체암로의 끝에 이르렀을 무렵 삼거동고인돌과 만났다. 소나무 밑에 큰 바위들이 작은 산둥지 위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반경 200m안에 49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나대용 장군이 존재했던 약 18km의 기나긴 체암로는 노안삼도로에 스며들며 끝이 났다.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1556~1612]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이다.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1560년 향리 신등재에 설치한 사숙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소년기 시절을 보냈다.

1575년 연상강유역에 출몰하는 왜구의 끊임없는 행패에 분노를 느껴 원래 문인이 되려고 했지만, 문필 생활을 그만두고 무예방면 수련에 전념하며 무인의 길을 걷기로 한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부터 나대용의 진가가 발휘되게 된다. 거북선을 발명하게 된 나대용은 거북선 건조 이후에도 판옥선과 거북선의 단점을 보완한 창선을 건조하는 등 병선 연구에 힘썼다.

1595~1596년 금구현감에 이어 능주, 고성현감 등을 역임하며 목민관으로 전란의 민심을 수습하고 민생고 해결에 선정하니 은덕을 기리는 거사비가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1597년 2월에 충무공 이순신이 모함으로 투옥되자 십여 동지들과 옥문 밖에서 무고함을 호소하여 충무공은 석방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는 9월 16일 명량대첩시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하여 용전분투 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598년 11월 8일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종제 치용이 순국함으로 통곡하기를 “원수를 어찌 다 갚으리!”하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 대첩을 거두는데 수공(首功)을 세웠다.

1606년 나대용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창선을 개발하였다고 고한다. 전투형 거북선과 탑승인원을 많이 필요한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하여,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창선을 건조했다.

1610년 정3품 통정대부로 벼슬을 올리고 남해수령을 계속 맡아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해추선 이라는 쾌속정을 고안 건조하여 국토 방위책을 세운다.

1611년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한 과학적 조선기술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으로 인정받고 경기 수군을 장악 종2품 가선대부 교동수사에 제수된다.

1612년 1월 29일 왜란시의 탄환 상처가 부발하여 향년 57세로 별세한다. 문평면 대도리 마전동 선영하에 예장하고 장군 몰후 287년이 지난 1859년에 호남의 유림들이 장군의 공과 덕을 기리기 위해 중종 때의 명현 나세찬 선생의 사우인 송재사에 배향(配享)함으로써 숭모의 뜻을 표해온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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