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9)-임방울대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9)-임방울대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9.2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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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임승근 선생의 예명을 따 명명
임방울대로의 시작점인 상무교차로

임방울대로를 취재하기 위해 광주신세계백화점과 광주U스퀘어 버스터미널을 지나 광주~무안고속도로로 연결되는 무진대로를 탔다. 임방울대로가 바로 이 무진대로에서 운남지구와 수완지구로 나가는 상무교차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임방울대로는 상무교차로에서 시작해 운남지구-수완지구-첨단지구-첨단대교-첨단2지구-신용교차로를 지나 양산택지지구 교차로에서 끝이 나는 꽤 긴 도로다. 대로답게 대부분 왕복 6~10차로이고, 총 길이는 10,631m다. 2009년 7월 27일 고시됐다.

광주시 관계자는 임방울대로로 부여한 사유에 대해 “국창 임승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예명을 사용해 명명했다”고 말했다.

(사)임방울국악진흥회 자료에 따르면 임방울은 1905년 4월 20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679번지)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임방울의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다음의 두 가지 추정이 있다. 어려서 울지도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방울이 판소리하는 장면을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하면서, “너야 말로 은방울이다”라는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다.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

임방울이 열 살 되던 무렵, 광주 송정리에서 나주의 명창 박재실이 이끄는 창극단(唱劇團) 공연이 있었는데, 이 공연은 임방울의 판소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무대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임방울은 박재실 문하에서 3년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를 전수받았다.

이후 임방울은 창극단을 그만두고 화순 능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공창식 선생의 제자가 되어 판소리의 여러 대목을 배웠다. 화순 사람 남국일이 임방울을 후원하여,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임방울이 열일곱 살 되던 무렵, 남국일은 임방울을 유선준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하도록 도왔다. 임방울은 유성준에게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은 뱃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씩씩한 느낌을 주는 동편제의 대가였다.

임방울은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리산 쌍계사에 토굴을 파고 독공을 하기도 했다. 유성준 선생에게 배운 소리제에다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개성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 시기 구수한 송정리 사투리가 판소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구수한 송정리 사투리가 판소리 안으로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던 중에 집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게 된 임방울은 일단 혼인을 하고 소리공부를 하라는 집안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맞아들인 부인이 한살 아래인 박오례 여사이며, 그 사이에 오희, 순희 두 딸과 아들 화택을 두었다. 임방울은 혼인 6년 후에 명창의 큰 꿈을 안고 상경 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처럼 오랜 수련 끝에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의 소개로 처녀무대인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창작으로 전하는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다.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일본·만주 등지에서 100여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그 뒤 음반취입과 판소리 공연에만 힘을 쏟았고 창극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판소리 전통을 최후까지 고수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서편제 소리의 최후 보루라고도 한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다 잘하였지만, 특히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잘하였다. 1960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수궁가> 발표회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몇 차례 공연을 가졌다.

이때 녹음하여 둔 테이프를 복사하여 취입한 음반인 <수궁가>와 <적벽가>가 전한다. 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李花仲仙)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

소리를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임방울은 김제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길로 서울 초동 집으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1961년 3월 8일 새벽,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임방울이 57세 되던 해였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8년 11월 20일에는 망우리의 묘가 여주 남한강 공원묘지에 이장되었다. 1992년 12월에는 광주 문화예술회관에 ‘국창임방울 선생 흉상’이 세워졌다. 1977년 8월에 송정청년회의소 주최로, ‘제1회 임방울명창기념 명창경연대회’가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1999년에는 (사)국창임방울선생기념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0년에 임방울에게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에는 (사)임방울국악진흥재단으로 통합하여 올해로 24회째 ‘임방울국악제’를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을 살았던 국창 임승근 선생의 예명을 따 명명된 임방울대로가 지나는 지구들은 전부 광주시의 확장에 따라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다. 따라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좌우로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상무교차로를 출발해 운남지구로 향하니 운남대교가 나온다. 운남대교는 국내 최초 ‘3주탑 콘크리트 사장교’다. 연장 445m, 폭 35.2m(6차로), 주탑 높이 42m 규모로 무등산의 입석대 주상절리를 형상화하고, 야간조명은 무등산 서광이 온누리에 퍼져 희망찬 광주의 미래를 향해 솟아오르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2009년 8월 11일 개통됐다.

운남대교

야경이 아름다운 운남대교

운남대교를 건너면 운남목련로가 좌우로 지나고 있다. 이 도로 건너가 바로 운남지구다. 운남지구를 지나는 임방울대로는 좌로는 운남주공 5,6,7단지를, 우로는 운남동 삼성아파트를 거느리고 있다.

이어 임방울대로는 하남대로를 넘어 수완지구로 달려간다. 이 길 좌우로는 중흥S클래스, 대방노블랜드, 호반베르디움 등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잠깐잠깐 끊기긴 해도 이 임방울대로 끝인 양산택지 교차로까지 이어진다.

수완지구를 지나는 임방울대로 좌측에는 광주농협농산물유통센터가 위치해 있다. 안전한 농산물을 광주시민에게 바로 공급하는 직거래 큰 장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농협농산물유통센터는 임방울대로 261번이다. 2011년 8월 9일 문을 열었다.

이를 지나니 곧바로 수완지하차도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올 6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가 촬영되기도 했다.

어린이 교통공원

수완지하차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 촬영

수완지하차도를 지난 임방울대로는 북문대로와 교차하며 첨단지구로 들어간다. 첨단지구를 지나다 보면 오른편 600m 안쪽에 월계동 장고분 2기가 있다. 월계동 장고분은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다.

첨단을 관통하며 달리는 임방울대로는 첨단대교를 건너 첨단2지구로 들어간다. 첨단대교 부근에는 ‘광주시민의 숲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어 찾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또 첨단대교 바로 직전에는 어린이교통공원이 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통안전 교육을 담당하는 어린이교통공원은 임방울대로 877번이다.

아파트와 상가들로 밀집된 첨단2지구를 지나면 북광주IC와 동림IC로 나가는 신용교차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임방울대로는 빛고을대로와 교차하며 양산지구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서로를 지나 양산택지지구 교차로에 이르러 끝이 난다.

양산지구 임방울대로 끝지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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